한국 농업에 직격탄 우려
개도국 유지가 최선이지만
통상압력 생각해야 하고
농업부문 혁신도 절실한 만큼
현명하게 대처해야
정인교 <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
통상마찰의 소용돌이가 갈수록 격해지고 있다. 미국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면서 미·중 무역갈등이 환율전쟁으로 비화할 조짐이다. 일본이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에 이어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국가) 제외까지 강행함으로써 한·일 갈등도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은 또 다른 암초를 만났다. 지난달 26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중국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가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에서 ‘졸업’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미국식 무역제재를 가하겠다고 공언했다. 물론 이는 다분히 중국을 겨냥한 것이다. 중국은 개도국 지위 문제는 WTO 논의 사항이지 미국이 요구할 게 아니라고 일축하면서도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다.
그동안 한국은 개도국 지위를 유지해 WTO 체제에서 농업 분야 시장 개방 부담을 덜고 보조금 지원에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개도국 지위를 포기해야 한다면 쌀, 고추, 마늘 등 주요 농산물의 관세를 대폭 낮출 수밖에 없다. WTO 허용보조금이 현재의 1조4900억원에서 8195억원으로 줄어들고, 5%의 낮은 관세율을 적용하는 연 40만8700t의 쌀 수입 물량도 늘려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농림축산식품부는 그러나 2008년 WTO 도하개발의제(DDA) 협상 당시 논의됐던 기준을 적용한 것으로, DDA 협상이 사실상 중단됐기 때문에 이런 전망은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반박하고 있다.
DDA 협상이 진행되던 10여 년 전 국내에서도 개도국 지위 유지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 WTO에서 개도국 지위 문제는 당사국이 판단해 스스로 결정하는 ‘자기 선언’ 방식이지만, 당시에도 국제사회에선 한국을 개도국으로 보지 않으려 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하지만 농업에 관한 한 한국은 국제경쟁력이 취약하고, 순 수입국이란 점을 들어 개도국 지위를 전제로 농업 협상에 참여했다. DDA 협상에서 개도국은 대체로 선진국 부담의 3분의 2를 지게 돼 있었다. 언론에 보도된 개도국 지위 상실 부담도 이런 기준을 적용한 계산에 바탕을 두고 있다.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미국은 WTO에서 개도국 지위 자기 선언 방식에 이의를 제기했다. 자기 선언이 허용됨에 따라 부유한 국가들이 시장 개방 폭을 줄이면서 자유로운 무역환경의 혜택을 누렸다는 것이다. 올초 비슷한 취지의 의견을 WTO 일반이사회에서 제기했고,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행정지시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
여기서 의아한 것은 WTO 상소기구 위원 임명절차 거부로 올해 말이면 WTO 분쟁절차 기능이 중단되고, 이로 인해 ‘WTO 고사 위기’를 초래한 것으로 비난받는 미국이 WTO에 개도국 지위 조정 역할을 주문했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8월과 9월은 휴가철이어서 WTO의 개도국 지위 협상이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중국 등 다수 국가도 이를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이 이를 알면서도 WTO를 언급한 것은 미국이 추진해온 WTO 무력화 비난을 회피하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어차피 미국은 트럼프식으로 ‘힘에 기반해(power-based)’ 양자적으로 처리하겠지만, WTO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나선다는 명분을 축적하는 것이란 얘기다.
미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주요 20개국(G20)의 회원국, 소득 수준, 무역 비중 등 네 가지 기준 중 하나라도 해당하면 개도국이 아니라는 개도국 지위 졸업 기준을 제시했는데, 한국은 이 네 가지 기준 모두에 해당한다. 10년 전 상황과 마찬가지로 한국이 개도국이라고 주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국내 농민 및 농업계의 어려운 처지를 감안하면 개도국 지위를 유지할 필요가 있지만, 한국을 개도국으로 보는 국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3개월 뒤 미국의 양자적 통상압력을 고려하면 기존 입장을 유지하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개도국 지위 포기는 농업정책의 근간을 변경하는 것으로 그 영향이 작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양자적 압력에 굴복하는 모양새를 보이기도 어렵기 때문에 결정이 쉽지는 않을 터다. 하지만 그동안 농업정책에 문제점이 적지 않았고, 농업정책을 업그레이드할 시점이기도 하므로 농정당국과 농업계는 현명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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