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34일만에 포토레지스트 허용
李총리 "원상회복 외교적 노력"
[ 조재길/박재원/도쿄=김동욱 기자 ]
일본이 지난달 4일 반도체·디스플레이 관련 세 개 품목의 대(對)한국 무역규제를 개시한 지 34일 만에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 수출을 허용했다. 일본을 상대로 강도 높은 무역보복 조치를 검토하던 우리 정부는 일본 제재를 한시 유보했다. 강경 일변도이던 한·일 간 대치 상태가 일단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는 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이낙연 국무총리 주재로 일본 수출규제 관계장관회의 및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를 열어 일본을 수출 우대국에서 제외하기 위한 ‘전략물자 수출입고시 개정안’을 논의했다. 일본을 수출 우대국이 포함된 ‘가’지역에서 제외하고, 신설한 ‘다’지역에 넣는 게 핵심이다. 일본이 지난 2일 각의(국무회의)에서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국가)에서 제외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가결한 데 따른 상응 조치다. 하지만 정부는 이 수출입고시 개정안 확정 및 추진 일정을 뒤로 미뤘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일본을 ‘다’지역에 넣는다는 기존 방침엔 변화가 없다”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은 추후 확정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화해 제스처’를 보낸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이 총리도 “우리는 일본의 경제 공격이 원상 회복되도록 외교적 노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세코 히로시게 일본 경제산업상은 이날 오전 “한국으로 수출할 때 개별허가를 받아야 하는 세 개 소재 중 일부 품목에 대해 무기 전용 우려가 없다고 판단해 수출을 허가했다”고 말했다. 일본이 수출을 허가한 포토레지스트는 삼성전자가 수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强) 대 강’ 대치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을 뿐 수습 국면으로 접어든 건 아니란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문병기 한국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두 나라 모두 큰 기조에는 변화가 없기 때문에 완전한 수습 국면으로 보기는 이르다”고 말했다.
韓·日 전면전, 일단 '숨고르기'…15일·24일·28일이 확전 분수령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7일 밤 10시30분 출입기자단에 ‘8일 오전 열리는 관계장관회의에서 전략물자 수출입제도 변경안을 논의한다’고 공지했다. 한국 정부가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국가)에서 제외해 ‘맞대응’에 나설 것이란 예고였다. 하지만 산업부는 8일 오전 10시50분 “논의 결과 수출입제도의 구체적인 변경 내용을 추후 확정할 예정이며 별도 브리핑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일본이 이날 오전 3대 수출 규제 품목 중 하나인 포토레지스트의 대(對)한국 수출을 한 건 허용했다는 보도가 나온 뒤다.
◆조금씩 달라지는 국내 기류
이날 관계장관회의에서 논의한 내용은 일본 정부의 무역 규제에 대한 상응 조치다. 한국은 전략물자 수출입고시상 전략물자 지역을 ‘가’ 및 ‘나’ 지역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다’를 신설해 일본을 여기에 넣을 방침이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2일 “(일본 조치에 대응해) 우리도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해 수출 관리를 강화하는 절차를 밟아나가겠다”고 발표한 데 따른 후속 협의다.
한국 정부가 이 상응 조치를 다 짜놓고도 발표를 미룬 건 정부 내에서 ‘사태 추이를 지켜보자’는 신중론이 조금씩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란 관측이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회의 모두발언에서 “일본이 3대 수출규제 품목 중 하나인 극자외선(EUV) 포토레지스트의 한국 수출을 처음 허가했다”며 “외교적 노력을 강화하겠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란 분석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이날 발언에서도 비슷한 기류가 감지됐다. 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긴급 주재한 국민경제자문회의 전체회의에서 ‘일본이 일방적인 무역보복 조치로 얻는 이익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원고를 읽으면서 ‘보복’이란 단어를 뺐다. 2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무모한 결정’ ‘중대한 도전’ ‘이기적인 민폐 행위’ 등 강경한 표현을 동원했을 때와는 결이 많이 달라졌다는 평가다. 정부 관계자는 “일본에 끌려가지 않겠지만 대화의 끈도 놓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심 일러…확전 가능성 높다”
한·일 간 ‘강 대 강’ 대치 국면이 일단 소강상태에 들어갔지만 언제든 확전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양국 정부가 한 발씩 양보하기엔 사안이 워낙 복잡하게 꼬여 있어서다.
일본이 규제 품목인 포토레지스트의 한국 수출 한 건을 허용한 데 대해선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7일 일본이 수출입 규정 시행세칙에서 개별허가 품목을 추가 지정하지 않은 데 이어 이번에 수출 허가까지 내준 것은 유화 제스처로 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하지만 일본의 수출품목 허가가 ‘한국 측 주장대로 수출 금지 조치가 아니다’란 자국 주장을 뒷받침하려는 ‘명분 쌓기’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세코 히로시게 경제산업상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한국이 금수조치라고 비판해 수출허가 사실을 예외적으로 공표한다”며 “한국 무역관리 체계의 취약성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반도체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일본이 의외로 빨리 수출 허가를 내준 건 일본 제품을 계속 써도 되는지 헷갈리게 하려는 전략도 있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산업부 관계자 역시 “일본의 종전 입장에서 특별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일본이 오는 28일 한국에 대한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를 실제 시행하는 만큼 최소한 이때까지는 확전 여부를 지켜봐야 한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상대국이 공세 수위를 조절하는 과정에서 반격을 받으면 갈등의 불씨가 종전보다 훨씬 커질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분수령이 될 시기는 15일 문 대통령의 광복절 메시지, 21일 한·중·일 외교장관회담, 24일 GSOMIA(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연장 시한 등이 꼽힌다.
산케이신문은 이날 “한국 수출관리를 둘러싸고 부적절한 사안이 새로 밝혀지면 (일본 정부가) 개별허가 품목을 종전 3개 외 추가로 확대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조재길/박재원/도쿄=김동욱 특파원 ro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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