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갈등, '샌프란시스코 체제' 허물수도
'경제전쟁 승리' 아닌 외교로 관계 회복해야
복거일 < 사회평론가·소설가 >
우리 기업들이 일본 기업들에 크게 의존하는 품목들의 국산화 계획이 마련된다. 외교 분쟁에서 파생된 경제 분쟁에 대처하는 방안이니, 대증요법의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대증요법치고는 부작용들이 클 것으로 보여 걱정스럽다.
이번 국산화 계획은 일본과 단절된 환경에서 공급망을 새로 만드는 ‘시장 설계’다. 그래서 일본과의 분쟁이 오래갈 것이란 가정 아래 추진된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일본과의 분쟁이 일찍 끝나면, 일본이 배제된 환경에 적응했던 기업들은 대부분 시장에서 밀려날 것이다. 범지구적 공급망이 형성된 세상에서 자급자족을 지향하는 정책은 큰 비효율을 낳을 수밖에 없다.
보다 큰 위험은 원인의 치료를 방해할 위험이다. 여당 연구소의 보고서에서 드러났듯이 현 정권은 자신의 외교 실패에서 정치적 이익을 얻을 심산이다. 높아진 지지도는 현 정권이 시민들의 눈길을 일본과의 경제 분쟁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외교는 국가 생존의 바탕이다. 이웃이 적대적 강대국들인 우리에겐 특히 그렇다. 오직 일본만이 우리 동맹국의 후방 기지요 보급창이다. 우리는 이번 분쟁의 내력을 살피고 빨리 관계를 회복시켜야 한다.
이번 분쟁의 단초는 2012년 대법원이 징용공 보상 소송에서 내린 판결이었다. 일본 법원과 한국 하급 법원들의 판결(기각)과 달리, 당시 한국 대법원은 원고 징용공들의 승소 판결(원심파기)을 내렸다. ‘재산 및 청구권 협정’이 그런 문제들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규정한 것을 당시 판결은 무시했다. 그 판결이 불러온 문제들을 수습해 협정을 지켜야 할 한국 정부는 사법부의 판결이니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 협정의 분쟁 조항은 먼저 외교적 경로를 통해 해결하고, 실패하면 중재위원회를 구성하도록 규정했다. 한국은 외교적 교섭에도, 중재위원회 구성에도 응하지 않았다.
자국 기업들이 피해를 입게 되자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전략적 물자의 수출 제한을 골랐다. 한국에 일방적으로 불리하면서도 압력을 정교하게 조절할 수 있는 방식이다. 따라서 한국은 잘못된 적과 잘못된 분야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싸우는 셈이다.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만 주목한 터라 현 정권은 협정의 무시에 담긴 국제정치적 함의들을 놓친 듯하다. ‘재산 및 청구권 협정’은 1951년 연합국들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바탕을 두었다. 이 조약은 연합국들에 대한 막대한 배상 액수와 일본의 지불 능력 사이의 큰 괴리를 메우려 시도했다. 특히 뒤에 나올 보상 요구들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데 마음을 썼다. 일본군의 포로가 됐던 연합국 병사들의 추가 소송을 막기 위한 조항까지 넣었다.
자연히 한국이 ‘재산 및 청구권 협정’을 무시하는 판결을 내리고 분쟁 해결 절차도 따르지 않으면서 일본 기업들의 재산을 침해하면,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된다. 현실적으로 유사한 소송들이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 이 조약을 통해서 2차 세계대전을 정리한 미국으로선 용납할 수 없는 사태다.
아울러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샌프란시스코 체제’라 불리는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 정책의 바탕이다. 미국은 일본, 한국, 필리핀, 중화민국, 베트남 등과 동맹을 맺었고, 그런 쌍무적 동맹들은 미국을 통해 연결됐다. 한국이 일본과 협정을 파기하는 것은 이런 체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일본이 한국에 경제 보복 조치를 취한 뒤 도움을 청하러 찾아간 한국 담당자들을 미국이 냉대한 데서 미국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드러났다.
외교 문제는 외교로 풀어야 한다. 현 정권이 선전하는 ‘경제 전쟁의 승리’로 외교 문제를 풀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재산 및 청구권 협정’을 포함한 ‘한일기본조약’을 소중히 여기고 허물려는 시도를 막아내야 한다. 그것은 14년에 걸쳐 갖가지 험난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이룬 성취였다. 그것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린 한국의 안정과 번영의 토대였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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