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 20년> 금융개혁 이끈 실명제…성과와 한계

입력 2013-08-06 06:01  

"차명거래 금지해야" VS "선의의 차명거래 피해자 양산 우려"

1993년 8월 12일 김영삼 대통령의 긴급명령으로 도입된 금융실명제가 이달로 시행 만 20년을 맞는다.

금융실명제는 가명거래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도명거래 처벌 규정을 만들어 기존 금융경제질서를 단숨에 바꿔버린 '사건'이었다.

이후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금융실명제법)에 이어, 금융회사가자금거래 개인에게 실제 당사자 여부와 금융거래 목적을 확인하게 하는 특정금융거래보고법(FIU법)과 범죄수익은닉규제법 등이 만들어져 금융실명제의 부족한 부분을보완했다.

하지만 합의에 의한 차명거래를 원천적으로 봉쇄하지 못한다는 한계점 때문에금융실명제법 개정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특히 최근 전두환 전(前) 대통령이나 CJ그룹 비자금 사건으로 차명계좌 논란이불붙으면서 정치권과 금융권에서는 차명계좌를 전면 금지하거나 차명거래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방안을 두고 갑론을박이 재연되고 있다.

◇ƈ전3기' 산고 끝 탄생한 금융실명제 1982년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 사건'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실명제 도입 시도는 금융시장 위축에 대한 우려와 정치권, 대기업의 반대 속에 흐지부지됐다.

이후 1993년 8월 1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은 긴급명령을 발동해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했다.

'기습 실시'가 아니었다면 또 실패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책임론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기는 했지만 금융실명제는 김영상 정부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금융실명제 시행 이후 정부는 두 달 동안 실명전환 기간을 뒀다.

실명전환 의무기간(1993년 8월 13일∼10월 12일) 직후인 10월 13일 재무부가 발표한 잠정 집계결과에 따르면 금융기관의 전체 가명계좌(1만원미만 휴면계좌 제외)에 들어있던 2조8천623억4천만원 가운데 96.0%인 2조7천480억2천만원이 실명 전환됐다.

실명전환된 차명계좌도 27만5천800좌(2조9천246억5천만원)에 달했다.

금융시장에는 충격이 있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갈 곳 잃은' 돈이 늘어나자 전년 동기 대비 현금통화 잔액 증가율은 1993년 7월 28.2%에서 8월 35.5%, 9월 39.5%, 10월 55.4%로 수직상승했다가 1995년 상반기에다시 20%대로 제자리를 찾았다.

8월 12일 725.94였던 주가지수는 다음 날 693.57로 32.37포인트(4.46%) 곤두박질 쳤고 이튿날인 14일에는 666.67로 26.90포인트(3.88%) 빠졌다가 1주일 만인 19일다시 730선을 회복했다.

당시 재무부장관이었던 홍재형 전 부총리는 "(금융실명제가) 정치권의 부패 선거자금이나 업계의 비자금 문제 해결에 상당한 영향을 줬다"며 "IMF때 조금 후퇴한것은 아쉽지만 한국이 발전하는데 하나의 징검다리가 됐다"고 평가했다.

◇20년만의 최대 화두, 차명계좌 전면금지 하지만 근본적인 한계점은 계속 도드라지고 있다.

현행 금융실명제법은 금융기관 종사자가 주민등록증 같은 '실명 확인증표'로 금융거래자의 실명 여부를 확인하도록 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훔쳐 금융거래를 하면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그러나 금융실명제 발표 당시 국민 다수가 차명거래를 실명제 위반으로 인식하고있었던 것과 달리 긴급명령이나 금융실명제법은 합의에 의한 차명거래 자체를 금지하고 있지는 않다.

금융거래의 투명성 확보라는 금융실명제의 취지를 고려하면 차명거래까지 막아야 하지만 금융기관이 모든 금융거래 당사자의 차명거래 여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결국 '차명도 실명'이라는 애매한 원칙이 공론화한 이후 차명계좌는 줄곧 사회적 화두가 돼왔다.

실제로 대법원은 1997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자신들의 명의로 실명전환해 업무방해죄로 기소된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과 이경훈 ㈜대우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금융기관이 자금출처를 조사할 실질적 권한이 없으므로 금융기관은 거래자의 주민등록상 실명 여부만 확인할 수 있을 뿐 돈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할 의무가 없으며, 금융기관을 속인 행위도 업무방해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판단 요지였다.

이후 FIU법이 만들어져 금융회사가 금융거래목적을 확인하고 의심되는 거래를 FIU에 보고할 의무가 생겼다.

또 의도적 차명거래는 대부분 탈세나 범죄에 이용되는데 탈세는 상속세 및 증여세법으로, 범죄는 범죄수익은닉규제법과 조세범처벌법에 따라 처벌하도록 법 체계가정비됐다.

하지만 여전히 합의에 의한 차명거래 자체를 금지하는 법 조항은 없다.

정치권에서는 20년간 해결되지 않은 해묵은 숙제에 대한 논쟁에 이미 불이 붙었다.

이종걸 민주당 의원은 최근 차명계좌가 적발되면 계좌 평가액 일부를 과징금으로 부과하도록 하는 내용의 금융실명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민병두 민주당 의원 또한 실명이 확인된 계좌를 명의자 재산으로 간주하고 실질권리자의 반환청구를 금지하는 쪽으로 관련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차명거래를 금지하되, 안되면 차명거래자 처벌이라도 강화하자는 것이 정치권의움직임이다.

◇"차명계좌 금지, 잠재적 범법자 양산하는 것" 그러나 정부와 금융권의 입장은 다르다.

금융거래 당사자의 '양심선언'이 있거나 검찰과 국세청이 나서지 않고서는 금융기관 종사자가 차명거래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현실적으로 없기 때문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의심거래(STR)나 고액현금거래(CTR) 보고제가 있기는 하지만 금융기관은 검찰도 국세청도 아니기 때문에 돈의 출처를 직접 확인할 수 없다"며 "수많은 금융거래를 누가, 어떻게 확인해 차명계좌를 가려낼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국민을 잠재적 범법자로 만들게 된다는 지적도 있다.

부모가 자녀의 월급을 관리하는 것, 친목모임 총무가 회비를 본인 통장에 넣어놓는 것, 부부가 공동으로 생활비 통장을 만들어 쓰는 것 모두 엄밀히 따지면 차명거래이기 때문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엄마가 '잘 보관해 주겠다'며 아이 세뱃돈 가져가서 본인통장에 넣는 것까지 몽땅 다 차명거래"라며 "(차명거래가 금지되면) 자신이 차명거래를 한다는 사실을 인식조차 못 한 채 범법자가 되는 사람이 부지기수일 것"이라고지적했다.

사전적 통제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사후적 처벌 규정이 유기적으로 짜여 있으니 차명거래를 전면 금지해 불필요한 혼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정치권이 여야를 막론하고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어 9월 정기국회가 열리면어떤 식으로든 금융실명제법을 둘러싼 논란에 불이 붙을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다.

금융권의 다른 관계자는 "정치권의 움직임이 적극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차명계좌 금지로 치러야 할 코스트(값)는 제대로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끝)<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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