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체를 지나서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로 트레킹을 하면 세계 여러 나라 산악인들의 추모비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한국인 산악인을 위한 위령비로는 2005년 푸모리봉 등정을 하다가 히말라야에 몸을 던진 정상균, 김도영 산악인의 추모비가 있고 1993년 5월 16일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다가 운명한 남원우, 안진섭의 추모비가 나타난다.
일본 산악인들의 추모비가 있는가 하면 세르파와 포터를 추모하기 위한 위령탑도 있다. 개중에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추모현판이 부서져있는 상태로 방치된 것들도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무거운 현판을 이곳까지 들고 와서 힘들여 만들어 놓은 추모탑을 왜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을까?
그런데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추모탑은 단연 네팔 셀파의 영웅이랄 수 있는 바부 치리 셀파(Babu Chiri Sherpa)의 위령비라 할 수 있다.
에베레스트에 가서야 처음 듣게 된 이름 바부 치리.
그는 에베레스트와 떼어 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에베레스트와 관련된 기념비적인 기록을 많이 갖고 있는 인물이다.
1965년생인 바부 치리는 에베레스트 지역의 탁신두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13세때부터 산에 오르기 시작한 그는 16세에 포터가 되었다. 그는 1995년에 2주 이내에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에 두 번이나 성공했다. 1999년도에는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산소 없이 잠도 자지 않고 21시간이나 머무르는 기록을 세웠다.
2000년 5월 20일에는 놀랍게도 무산소로 16시간 56분만에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기록은 1998년 가지 셀파가 세운 20시간 54분의 기록을 4시간이나 단축한 대기록이다.
바부 치리는 에베레스트를 모두 열 한 번이나 오르고 하산하던중 캠프 2주변의 크레바스에 추락하여 36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이때가 2001년 4월 29일의 일이었다.
훗날 랑탕을 홀로 트레킹 할 때 골프반장(Golphubanjang)의 라마 롯지(Lama Lodge)에서 바부 치리와 같은 동네에 살았고 그와 아주 친했다는 셀파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락빠 셀파(Lakpa Sherpa).
생전의 바부 치리 셀파는 지역사회에 대한 애정이 깊고 진실했으며 성격이 아주 좋았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락빠 셀파는 그렇게 훌륭한 친구를 잃은 것이 무척 가슴 아프다고 한다.
천부적으로 고산에 적응된 신체와 뛰어난 심폐기능, 타고난 체력 그리고 성실함과 진실성을 갖춘 셀파족. 그들이야말로 ‘히말라야의 호랑이’라고 불러도 아깝지 않을만큼 히말라야 등정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면서 히말라야 알피니즘에 커다란 공을 세워왔다.
산악지역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에게 고산등정이란 동기를 부여해 준 것은 물론 서구의 알피니스트들이었다. 하지만 셀파로 통칭되는 지역주민들의 도움이 없이 수 많은 알피니스트들이 히말라야의 고산들을 그렇게 쉽사리 등정할 수 있었을까?
반대로 산중에서 가난하게 살던 셀파족들은 외국에서 온 알피니스트와 함께 고산을 등정하면서 차근차근 네팔의 중산층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수입이 좋은 고소셀파의 경우 솔로 쿰부 지역에 롯지를 하나씩 둘씩 갖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수도 카투만두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알피니스트들과 셀파족은 서로 도와가면서 각자의 목표를 향해 달려온 것이다.
>>>10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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