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률 기자] 영화 '최종병기 활'이 화제다. '최종병기 활'은 올해 흥행에 성공한 한국영화 ’써니'를 넘어 올해 개봉한 한국 영화 중 최다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1위'를 기록했다. 관객수는 10월10일까지 약 738만 명이다.
이 영화는 청나라 정예부대(니루)에게 소중한 누이(문채원)를 빼앗긴 조선 최고의 신궁(박해일)이 활 한 자루로 10만 대군의 심장부로 뛰어들어 거대한 활의 전쟁을 시작하는 영화. 영화제목이 주는 인상만큼 긴장감이 팽팽한 영화다.
인수봉에도 활의 이름이 붙여진 바윗길이 있다. 바로 궁형길이다. 옆길에서 보면 인상을 쓰면서 적지 않게 힘을 쓰고 있는 등반자들을 발견할 수 있는 궁형길은 넷째 마디의 최고난이도가 5.11b로 선등을 서기가 결코 만만치 않은 바윗길이다. 때문에 궁형길을 선등한다는 의미는 완력과 기술 모두 겸비한 수준급 클라이머라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형길은 클라이머의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며 사랑을 받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클라이머는 결코 쉬운 길을 원하지 않는다. 쉬임없이 도전하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불가사의한 존재가 바로 클라이머들이기 때문이다.
궁형길은 오전부터 등반자로 바쁘다가 오후 두 시가 넘어서야 자리를 내주기 시작한다. 궁형길의 출발지점은 인수봉 동면 오아시스에서 의대길의 첫째 마디와 같다.
첫째 마디는 거리가 30미터로 슬랩과 크랙이 섞여있는 난이도 5.9의 바윗길이다. 완만한 경사의 슬랩에 붙어 오르다 경사가 세어지면 작은 돌기를 찾아 손끝으로 매달리듯 잡고 몸의 무게 중심을 좌측으로 빼내면서 첫째 마디를 돌파한다. 둘째마디는 거리 30미터의 크랙길이다. 선등연습을 할때 자주 이용되는 인수A의 바로 오른쪽 길로, 홀드가 좋아 등반이 크게 어렵지 않다. 난이도는 5.7.
궁형길의 본격적인 문제풀이는 셋째 마디부터 시작된다. 셋째 마디는 거리 30미터의 크랙길로 난이도는 10a. 그러나 난이도는 그냥 난이도일 뿐 셋째 마디는 선등은 물론이거니와 5.11급 클라이머라 하더라도 후등이 결코 만만치 않다.
궁형길의 ‘궁형’이라는 말은 바로 이 셋째 마디에서 나왔을 것이다. 크랙길이 우측으로 배가 튀어나온 거대한 활모양을 하고 있다. 활의 길이가 30미터인 셈이다. 실제로 활중에서 가장 크다는 ‘정량궁’의 길이가 168cm이고 정량궁보다도 큰 ‘예궁’은 2미터에 가깝다고 하는데 그렇게 보면 인수봉의 활은 ‘인수’라는 거인만이 쏠 수 있는 화살이고 등반자는 팽팽한 활시위에 매달린 활과 같은 모양새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등반자가 매달린 활은 시위가 아니라 활의 앞으로 휘어진 부분이다. 크랙이 직선이나 사선으로 이루어져있다면 등반자의 힘이 그대로 크랙에 전해지면서 등반이 수월해지겠지만 크랙은 몸이 진행하는 방향의 오른쪽으로 휘어져있다. 자연히 힘의 집중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분산되며 밸런스가 잘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궁형길 셋째마디 크랙의 묘미다.
궁형길 셋째 마디에 처음으로 붙어본다. 만만한 난이도 5.10a. 어쩌다 한번 찾게 되는 실내암장이지만 5.10a~5.10b 정도의 난이도는 온사이트로 붙어도 완등이 크게 어렵지는 않다. 리드 클라이밍의 경우에도 온사이트에 실패하면 두어 번 연습후에는 오를 수 있는 정도의 난이도가 5.10a~b인데 궁형길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출발지점에서는 크랙이 있으니까 별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출발지점만 벗어나면 확실하지 않은 크랙들이 줄을 지어있어 긴장을 하게 된다.
필요 이상으로 힘을 주어 크랙을 등반하다보니 허리에 무리가 간다.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등반자들은 키가 큰 등반자들이 “장비 하나를 더 갖고 있다”며 부러워하는 경우도 있지만 볼더링세계챔피언 김자인의 키가 그리 크던가? 153cm의 단신이다. 키가 크면 홀드를 잘 잡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암벽등반시 꼭 필요한 순발력이나 슬랩등반시 필요한 유연성은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산은 누구에게나 다 공평한 것이다.
셋째 마디가 난이도 이상으로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크랙의 특성상 중간에 볼트가 없고 발디딤이 편치 않아 중간에 잠시라도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점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등을 크랙 윗부분에 지탱하고 왼발로 버티면 잠시라도 편히 쉬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도 썩 편하지만은 않아 쉼 없이 궁형길 셋째 마디 크랙을 완등하고 나면 거친 숨을 쉬게 마련이다. 셋째 마디는 궁형길의 크럭스는 아니지만 궁형길을 상징하는 마디이다. 궁형길 셋째 마디는 인수봉을 통털어 가장 어려운 5.10a급의 크랙 중 하나인 것이 분명하다.
궁형길의 크럭스는 넷째 마디다. 출발해서 트레버스를 하기 까지는 홀드가 좋아 잠시 방심하기 쉽지만 바위턱을 세 번 올라서는 과정에서 탈진할 정도로 난이도가 높다. 5.11b의 난이도를 실감나게 하는 구간이다. 5.11급의 클라이머가 아니라면 캠 없이는 결코 후등도 쉽지 않은 구간이다. 마지막 지점에서 손을 더듬어 잘 잡히는 홀드를 잡고 올려치면 드디어 귀바위와 하늘이 보인다. 넷째마디를 넘어서면 비로소 궁형길의 종착역인 귀바위 테라스. 의대길, 구조대길, 벗길의 종착지와 같다.
궁형길은 지금부터 36년 전인 1976년, 동양산악회가 일주일여를 매달려 개척한 길이다. 궁형길은 바윗길이 마치 활처럼 휘어진 모양이라는 의미로 ‘궁형(弓形)’이라 이름 붙여졌다. 고전적이면서도 바윗길의 형상을 잘 살린 이름이다. 당시 동양산악회에는 이용대(현재 코오롱등산학교 교장), 서순만, 정해욱, 윤철상 등 쟁쟁한 산꾼들이 활약하던 강한 산악회였다.
이들 동양산악회 멤버가 어센트산악회의 김재근과 함께 개척팀을 꾸렸다는 것은 특기할만하다. 당시 20대의 팔팔한 젊은이였던 이들은 당시의 가장 큰 고통이었던 배고픔을 이겨가며 “인수봉에 길을 낸다”는 개척정신으로 불타올랐을 것이다. 이들 개척자는 당시의 세계등반사조가 그러했듯 자유등반을 추구했으며 피톤은 8개, 볼트는 넷째 마디에 단 하나만을 설치했을 뿐이다.
인수봉 귀바위 테라스 앞에 서서 시야에 가득 찬 북한산을 바라다본다. 이제 바위 시즌도 고작 한 달 남짓이 남았을 뿐이다. 11월에 접어들면 바위는 변심한 여인처럼 언제 그랬냐싶게 차가워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바위에 매달려 보아야 만만치 않은 쌀쌀함에 고개를 내젓고야 말 것이다. 어쩌면 등반도 인생과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생에는 나이와 시기에 따라 꼭 해야 할 것들이 있다. 순간순간을 불처럼 태우다보면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에게 따뜻한 온기를 골고루 전달 할 수 있을 것이다. 등반도 마찬가지다. 불꽃같지 않은 등반을 어찌 등반이라 칭할 것인가.
쉽고, 재미있고, 간단하고, 빠른 것 좋아하는 이 시대에 터지고, 깨지고, 떨어지며 중력을 무시하고 바위를 오르는 클라이머를 뭐라 하지 마라. 그들은 그렇게 그들만의 인생을 불태우고 있나니. 인수봉 귀바위 테라스에서 바라본 북한산은 어느덧 쓸쓸하게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한경닷컴 bnt뉴스 기사제보 kimgmp@bntnews.co.kr
▶한국의 바위길을 가다(1) 인수봉 동양길 / 클라이머가 행복해지는 변주곡
▶한국의 바윗길을 가다(10) 인수봉 빌라길 / 명품길로 인정받는 인수의 지존
▶한국의 바윗길을 가다(19) 도봉산 배추흰나비의 추억 / 배추흰나비는 왜 그때 날아 왔을까?
▶[김성률의 히말라야 다이어리 ①] 안나푸르나를 향하여
▶[김성률의 에베레스트 다이어리 ①] 가자! 에베레스트를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