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바윗길을 가다(31) 설악산 장군봉 석이농장길 / 석이버섯이 알려준 클라이머의 숙명

입력 2014-09-25 16:16   수정 2014-09-25 16:15


[김성률 기자] 서울에 거주하는 바위꾼이라면 주말 등반지는 거의 예정되어 있다고 과언은 아니다. 선인봉이 아니면 인수봉이 그 대상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자연암장을 찾는다면 관악산에도 매바위암장이나 BAC암장이 있고 수락산 자락에는 내원암장이 있다. 서울서 차로 두 시간 정도의 거리에는 경치 좋은 춘클릿지도 있고 하드 프리를 만끽할 수 있는 간현암장이 있으며 강화에는 여름을 나기 좋은 함허동천 암장도 있다.

그러나 수도권을 벗어나 본격적인 암벽등반을 한다면 가장 먼저 손에 꼽을 수 있는 등반지는 어느 곳이 될까? 바위를 좀 한다는 클라이머들이 가장 가고 싶은 바윗길을 투표한다면 아마도 1위는 단연 설악산이 아닐까?

설악산에는 바윗꾼들이 꿈꾸는 고난이도의 바윗길들이 즐비하다. 적벽에는 손정준 씨가 첫 자유등반에 성공하면서 우리나라의 자유등반사를 새롭게 쓴 적벽의 크로니길(5.13b/c)이 버티고 있고 울산바위에는 인클길(5.12a)과 인클 주니어(5.11b) 그리고 난이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고난도의 비너스길(5.10c)이 있다.


뿐이랴, 설악의 릿지길은 또 어떠한가. 바윗꾼이라면 꼭 한번 등반하고 싶어 하는 장쾌한 릿지길 돌잔치길(5.11b), 우주의 이름 모를 혹성에 내려앉은 것과 같은 착각을 안겨주는 ‘별따는 소년들 길’, 수 많은 암벽등반가들의 입문을 위한 길로 정평이 나있는 ‘한편의 시를 위한 길’, 미륵장군봉의 몽유도원도 등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절경을 간직한 릿지길의 보배와도 같다.

그러나 설악이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자주 가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애써 원정등반 계획을 세웠다가도 비가 오는 등 날씨가 받쳐주지 않아 등반을 포기하는 일이 흔하게 발행하는 것은 산악지대의 특성 때문이리라. 당일등반도 사실상 어려워 큰 마음 먹고 최소한 1박2일에서 2박3일의 등반기간을 잡고 마음이 들떠 도착하게 되는 곳이 바로 설악이다.

올해 설악산 등반의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5월19일 설악산 장군봉 석이농장길과 적벽 자유2836을 등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에는 설악산 원정등반이 썩 마음에 내킨 것은 아니었다. 우선 지난해 추락사고의 후유증으로 아직까지도 등반근력이 회복되지 않은 듯 했다. 지난해 여름 장군봉 기존길에서 등반자들이 몰리며 병목현상이 일어나고 등반이 크게 지체되면서 허리에 무리가 간 기억도 새롭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이도가 있는 두 개의 바윗길 곧 석이농장길에 이은 적벽등반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퇴근후 지친 몸으로 당산동으로 이동해 준비된 승용차를 타니 이때가 밤 10시30분. 의외로 막힘없이 설악동에 도착하여 쓰러지듯 잠에 빠져들었고 다음날 아침 7시경에는 장군봉 석이농장길 첫째 마디 앞에 설 수 있었다. 설악의 공기는 북한산이나 도봉산의 공기와 또 다른 것만 같다. 나무와 숲의 향이 공기 중에 더욱 깊게 배어있는 것도 같다.


하람산악회의 송기승 대장이 첫째 마디를 걸어가듯 선등하며 나서는데 후등자들은 앞으로 다가올 운명(?)도 모르는 채 희희낙낙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그도 그럴것이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인수와 선인에서 치이다가 이날 석이농장길을 첫 등반하는 상쾌함과 여유가 자유분방한 기운을 불어 넣었으리라.

석이농장 첫째마디. 난이도 5.4. 정말 갈만한 바윗길이지 않은가? 평이한 바윗길이다보니 오히려 신중하게 등반을 하게 된다.

석이농장길의 난이도를 살펴보면 바로 왼쪽에 위치한 꼬르데길과 엇비슷해 보인다. 꼬르데길의 난이도는 첫째 마디가 20미터에 난이도 5.4. 둘째 마디가 30미터에 5.10b, 셋째 마디 28미터 5.10b, 넷째 마디 35미터 5.10a, 다섯째 마디 15미터 5.10a, 여섯째 마디 18미터 5.9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마디가 22미터 5.10b의 난이도이다.

석이농장길은 첫째 마디가 20미터 5.4, 둘째 마디가 27미터 5.10a, 셋째 마디 29미터5.10c, 넷째 마디 30미터 5.10a, 다섯째 마디 20미터 5.10a, 크럭스 구간인 여섯째 마디가 20미터 5.10d, 일곱째 마디가 26미터 5.10c 그리고 마지막 마디인 여덟째 마디가 5.10a에 이른다.

물론 석이농장의 최고난이도가 5.10d로 꼬르데길의 5.10b보다는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꼬르데길 일곱째 마디에 석이농장길 여덟 마디, 등반 거리나 텐 급의 난이도도 고만고만해 보인다. 자 그럼 바로 이웃한 두 바윗길의 난이도는 어떨지 몸으로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다.


둘째 마디부터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된다. 밑에서 일별하기에는 손홀드가 좋을 것 같고 크게 어려울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의외로 간단치는 않다. 이 같은 느낌은 다섯째 마디까지 계속 이어진다. 장군봉 바위의 습성이 슬랩이 별로 없이 크랙으로 구성되어서 요철은 분명하지만 의외로 벙어리성 홀드가 많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왼쪽으로 날개처럼 튀어 나온 크랙을 잡고 올라간다. 둘째 마디를 마치면 그제서야 어느 정도 고도감이 느껴진다. 신록이 참 푸르러서 눈이 시릴 정도다.

석이농장길은 셋째 마디부터 등반이 만만치 않다. 지방에 있는 바윗길을 등반하다보면 실제의 난이도 보다 높게 평가되는 경우가 많은데 석이농장의 난이도는 딱 그만큼의 어려움을 갖고 있다. 석이농장길은 까다로운 구간이 많아 선등자의 주의가 필요할 것 같다. 그말은 곧 인수나 선인에서 텐 급을 선등하였다고 해서 누구나 석이농장길을 선등할 수는 없다는 말과도 같다. 셋째 마디 이후에 후등자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니 어느새 웃음기는 모두 사라지고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다섯째 마디에는 수직의 바위 위에 석이버섯이 가득 달려 있다.

석이버섯 : 깊은 산의 바위에 붙어서 자라는 엽상지의(葉狀地衣). 지의체는 지름 3∼10cm의 넓은 단엽상. 거의 원형이고 표면은 황갈색 또는 갈색. 광택이 없고 밋밋하며 뒷면은 흑갈색 또는 흑색으로 미세한 과립상 돌기가 있다. 마르면 단단하지만 물에 담그면 회록색으로 변하고 연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버섯은 습한 곳에 서식하는데 석이버섯은 바위 위에서 햇볕을 온몸으로 모두 받아내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 또한 클라이머의 본질과도 닮아 보인다. 마음 속으로는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막상 바위에 붙으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등반을 멈출 수 없는 수 없는 클라이머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석이농장길의 하이라이트는 여섯째 마디에서 시작된다. 여기까지 등반하면서 등반자들은 어느 정도 힘이 빠지게 된다. 이 상태에서 적지 않은, 아니 있는 힘을 모두 발휘해야 통과할 수 있는 구간이다. 선등자는 두 번째 볼트에 줄을 걸기가 결코 만만치 않다. 우측으로 가는 침니를 통과해야하는 데 생각보다 깊다. 침니 안에서 확보물을 설치하고 나와 오버행을 힘차게 넘어서야 하기 때문에 선등자는 적지 않은 부담이 생긴다.

그렇다고 후등자가 편한 것도 아니다. 선등자는 후등자를 위해서 슬링을 걸어 놓지만 초급자라면 슬링줄을 잡고 턱을 넘어서기가 간단치 않다. 한 마디로 힘을 많이 써야 통과할 수 있어 실력 있는 선등자는 재미있고, 힘이 부족한 등반자는 죽을 맛을 보는 구간이기도 하다.

이 구간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여성 등반자가 적지 않다고 한다. 어느 정도의 기술과 함께 완력이 있어야 하는데 여성 클라이머가 이 두 가지를 함께 갖춘다는 것이 사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등반팀의 두 여성 등반자들은 대범하고 차분하게 등반을 마쳐서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운동을 열심히 했거나 타고난 클라이머, 둘 중의 하나가 분명했다. 난이도는 전 루트를 통해서 가장 센 5.10d.


여섯째 마디를 넘었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다. 일곱째 마디가 등반자를 준엄하게(?) 내려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마디에 비해서는 수월해 보이는 크랙구간이어서 어느 정도 힘을 쓰면서 오르다 보면 "여기는 갈만한데?"라고 내심 쾌재를 부르다가 마지막 벙어리성 홀드를 만나다 보면 이내 생각이 바뀌게 된다.

"난이도는 바윗길 어느 곳에서든지 숨어 있게 마련"인 것이다. 기자도 선등자가 후등자를 위해 남겨놓은 프로그 퀵드로를 잡고 한참 씨름을 하면서 갖은 인상을 쓰고 일곱째 마디의 등반을 마무리를 했는데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진을 찍어놓아 실소를 머금기도 했다. 5.10c 정도의 난이도인데도 전혀 힘도 쓰지 못하고 확보물을 잡고 있으니 연습이 거의 없던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여덟째 마디는 8미터의 직벽 크랙구간이다. 난이도는 5.10a이지만 이곳에 이르러서는 거의 탈진 상태가 되기 때문에 끝까지 등반이 쉽지만은 않다. 게다가 마지막 홀드 역시 쉽게 손에 잡혀지지 않고 흐르는 느낌이 든다. 마지막 마디는 내 힘으로 오르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있는 힘껏 홀드를 잡아 몸을 일으켜 세워 보지만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부끄럽게도 두 어 번의 시도 끝에야 등반을 마칠 수 있었다.


힘겹게 여덟째 마디 등반을 끝내면 장군봉 정상의 장관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대청봉은 물론이고 귀바위처럼 뾰족 솟아있는 세존봉도 보인다. 동해 방향으로는 울산바위의 기상 또한 대단하다. 그제서야 힘들게 등반한 클라이머의 얼굴에서 환한 웃음이 피어오른다.

석이농장길 등반은 당초 계획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아침 7시경에 시작한 석이농장 등반은 7명이 하산을 완료했을 때 오후 3시반경이 되었다. 적벽 자유 2836의 등반은 역시 다음 기회로 미루게 되었다.

그리고 보니 지난해부터 별렀던 울산바위 비너스길과 돌잔치길 완등은 올해 꼭 마무리해야 할 숙제가 되고야 말았다. 특히 뜻이 있는 클라이머에게만 길을 내어주는 비너스 바위는 과연 "낯선 남성이 자신의 다리를 잡고 옆구리를 돌아 오르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인지" 자못 기대가 크다.

장군봉에서 30미터 하강을 하고 다시 60미터 하강 지점에 확보를 마치자 저 멀리 설악의 산과 계곡이 눈 아래로 가득 들어온다. 장군봉 석이농장길과의 이별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이 길을 개척하고 명명한 바로 그 클라이머는 이 바윗길에 단순히 석이버섯이 많았기 때문에 석이농장길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아니다 적어도 그는 바위에 붙어서도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석이버섯을 바라보며 클라이머의 숙명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름 붙였으리라 석.이.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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