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바윗길을 가다(43) 인수봉 검악B길 / '자유를 향한 몸짓’이 빚어낸 희망의 길

입력 2014-09-25 16:25   수정 2014-09-25 16:25


[김성률 기자] 추석을 코앞에 둔 9월말, 모처럼 인수봉에는 한가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아침 8시전부터 등반이 시작되었어야 마땅한 인기 코스들이 오전 11시까지도 텅하니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햇볕이 내려 쪼일 때는 따사롭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금방 바람이 불 때는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등반하기에 가장 적절한 가을임을 실감나게 한다.

명절을 앞두고 급하게 등반을 하게 된 이유는 검악산악회가 개척한 두 개의 검악길 중의 하나인 검악B길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검악B길은 1981년 검악산악회의 이준, 최정희 등이 개척한 길이다. 당시 검악산악회는 이미 십자형의 크랙으로 유명한 검악A길을 개척하는 등 활발한 산악활동으로 주목을 받고 있던 산악회였다.

검악A길은 1970년 5월, 김정명, 홍성복, 원준길, 이인기 등의 검악 산우들에 의해서 개척됐다. 검악A길이 더욱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등반을 하다 한 떨기 국화꽃이 된 애인을 위해 만들어진 길이라는 것이었다. "저 멋진 십자길로 등반을 하면 좋겠다"는 숨진 애인의 바람을 현실화시킨 길이다. 이 길을 개척하는 데에는 자그마치 1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한국의 바윗길을 가다(5) 인수봉 검악길 / 바위꾼의 사랑, 검악에서 꽃피우다)

검악b길은 그동안 인수봉 동면 즉 대슬랩의 왼쪽 위 부분에서 시작하는 세 마디의 바윗길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번 취재 결과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검악B길은 독립된 바윗길로 출발하며 모두 다섯 마디로 이루어진 바윗길이었다.


이날 아침 검악B길의 개척자인 이준, 최정희 씨와 만나 개척 당시의 검악B길 출발지점을 찾아 본 결과 검악B길은 대슬랩에서 왼편으로 돌아 인수B길로 진입하기 전 약 10미터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개척 당시에는 상부의 세 마디를 먼저 개척하고 아랫부분의 두 마디는 나중에 개척했다고 한다.

선등은 최정희 대장이 맡았다. 최 대장은 그동안 숱한 고산거벽 등반을 통해 '검악'의 명성을, 나아가 대한민국 클라이머의 실력을 세계에 각인시킨 출중한 산악인이다. 1989년도에는 아이거와 마터호른 북벽 등정에 성공했다. 이후 히말라야 시샤팡마 등반에 이어 1993년 2월에는 피츠로이를 등반했다. 2002년도에는 단장을 맡아  매킨리봉 원정을 다녀오는 등 그의 등반경력은 실로 만만치가 않다.  

검악B길 첫째 마디는 그러나 오랫동안 등반이 이루어지지 않아 크랙 사이에 흙과 잡초가 잔뜩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행히 오랜 기간 등반자의 손을 타지 않아서인지 바위의 결은 살아있었다.

조심스럽게 바위의 결을 만지는 최 대장 앞에서 검악B길의 첫째 마디 크랙은 순순히 그에게 몸을 맡길 것인가. 선 굵은 좌향크랙인 검악B길 첫째 마디는 멍텅구리성 홀드여서 자세를 잡기가 결코 쉽지 않았지만 관록의 최 대장은 한땀 한땀 바느질을 하듯 크랙을 조심스레 다루어가며 힘차게 솟아오르는 첫째 마디 크랙등반을 마친다.


기자가 “난이도가 얼마나 되는 것 같으냐”고 물으니 최 대장은 의외로 “정확한 등급을 매기기가 쉽지 않다”고 답한다. 그도 그럴 것이 2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등반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탓에 정상적인 바윗길과는 달리 잡초와 흙 무더기가 등반을 적지 않게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등반이 수월하지만은 않은 듯 중간중간 홀드가 애매한 구간이 있다고만 말한다. 이 구간의 난이도는 정비가 된 이후에 제대로 매겨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최 대장의 빌레이를 보는 이는 검악B길을 개척할 당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개척자 이준 씨다. 그는 오랫동안 최 대장과 등반을 하며 호흡을 맞춰왔으며 최근에는 암수술까지 받는 등 투병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영원한 산꾼’답게 지금도 현역 클라이머임을 자부하고 있다.

이번에는 최 대장의 빌레이를 보고 이준 씨가 등반을 한다. 그는 “오랜만에 자신이 개척한 검악B를 원래의 길을 따라 등반을 하니 감회가 새롭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다시 둘째 마디를 출발한다. 둘째 마디 초입에는 다소 까다로운 슬랩이 자리 잡고 있다. 역시 물흐르듯 밸런스를 잘 잡고 등반을 해야 무리가 없다. 최 대장은 둘째 마디의 크럭스 구간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듯 하더니 거뜬하게 통과하고 비교적 쉬운 슬랩 구간을 성큼성큼 내딛으며 확보까지 마쳤다.  

둘째 마디가 끝나면 그곳이 흔히 검악B길의 출발 포인트로 삼는 출발지점이다. 거리는 약 37미터에 난이도 5.9의 슬랩으로 되어 있다.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추어 온 두 사람 사이에는 별 다른 신호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최 대장이 출발하면 이준 씨는 빌레이를 보고 등반이 끝나면 이어서 후등자가 출발한다.


두 사람은 드디어 검악B길을 통털어 가장 난이도가 높다는 넷째 마디 앞에 섰다. 이 구간의 공식적인 난이도는 인공등반에 슬랩 5.9로 정도로 잡는데 과연 그럴까? 난이도만을 보고 어렵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검악B길의 선등은 중급이상의 실력이 되어야 가능하다.

최 대장이 드디어 출발을 한다. 초입에서는 퀵드로우를 사용하여 인공으로 등반하고 검은 흑점까지 진출한 다음 이 흑점을 잡고 일어나 다시 발로 흑점을 밟은 다음에 등반을 이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의외로 등반은 간단치 않다. 이 구간이 검악b 넷째 마디의 크럭스이자 가장 재미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이곳을 등반한다”는 최 대장은 만만치 않은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거뜬하게 크럭스 구간을 통과해버린다. 세월이 지나도 실력은 결코 녹슬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뒤(빌레이)를 봐주는 선배를 굳게 믿기 때문일까. 최 대장의 등반에는 여유가 묻어나온다. 

기자가 직접 등반을 시도해 보고 중견산악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본 결과 이곳의 전 구간 자유등반 난이도는 5.11c 이며 인공등반구간 이외의 등반은 난이도 5.10c에 이른다는 것이다. 실제로 기자는 난이도만 살펴보고 이곳을 등반하다가는 결국 완등을 하지 못하고 생공사를 거쳐 인수b로 넘어가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넷째 마디 등반을 마치면 검악B길은 거의 다 끝낸 것과 다름없다. 다섯째 마디는 거리 37미터 난이도 5.7 정도의 슬랩구간이다.

등반을 마치고 이준 씨가 하강을 시작했다. 수술 후유증 등으로 아직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닌 그는 이날의 취재를 위해서 일부러 복대를 차고 등반에 나섰다. 그러나 제아무리 컨디션이 좋지 않더라도 결국 예정된 등반을 끝까지 해치우는 그는 역시 틀림없는 산꾼이었다. 

이준 대장은 “시간이 되면 검악B길 첫째 마디의 흙과 잡초도 깨끗이 치우고 안전한 등반을 위해서 중간 부분에 볼트도 설치하여 더 많은 등반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겠다”고 오랜만의 등반소감을 피력했다. 그와 최 대장의 바윗길에 대한 생각은 “등반실력이 아주 뛰어난 몇 사람만을 위한 바윗길보다는 많은 산악인들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안전하고 재미있는 등반할 수 있는 바윗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81년, 검악산악회에서 활동하며 검악B길을 개척한 이준 씨는 당시의 등반실력으로 인수봉에서도 손으로 꼽을 정도로 탁월한 기량을 자랑했다고 한다. 산으로 향한 그의 열정은 누구도 말리지 못할 정도여서 직장을 잡고 몇 개월 근무를 하게 되면 그동안 모아 놓은 돈으로 인수봉 검악산악회의 캠프 사이트로 들어와 많을 때는 6개월 가량 머무르며 등반을 했다고 한다. 하루에 서 너 개의 바윗길들을 등반하는 것은 물론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프리 솔로 클라이밍도 감행했다.

이준 씨가 "지금 생각하면 참 미친 짓이었다"고 말하는 단독등반은 '프리 솔로 클라이밍(Free Solo Climbing)'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후등자의 자일 빌레이(Belay / 확보) 없이 등반을 하는 방식의 '추락은 곧 부상이거나 사망'까지 이르게 하는 첨예한 방식의 등반형태이다. 프리 솔로 등반은  등반기량을 엄청나게 높여주기는 하겠지만 단 하나 뿐인 생명을 담보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고도로 위험한 등반이다.


프리 솔로 클라이밍으로 유명한 산악인은 독일의 전설적인 클라이머 볼프강 귈리히이다. 볼프강은 1991년 세계 등반 사상 프리 클라이밍의 난이도 5.14d급을 최초로 돌파해 세계 산악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1960년 10월 24일생인 볼프강은 14세부터 암벽 등반을 시작했고 17세 때부터 프리 클라이밍을 시작해 9급(IX) 루트를 돌파하고, 18세에 독일에서 최고 수준의 암벽 클라이머로 부상했다. 볼프강은 고도의 등반을 위한 강한 근력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아침 200회의 팔굽혀펴기를 했고 낮에 등반을 한 다음 저녁에는 다시 200회의 팔굽혀펴기를 했다고 하니 얼마나 자신을 등반실력을 갈고 닦았는지 알 수 있다.


볼프강은 모두 다섯 번의 고난도 프리 솔로 등반을 했고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국 요세미티의 ‘세퍼릿 리얼리티(Separate Reality 5.11d)’등반이다. 요세미티의 캐스케이드폭포 부근에 위치해 있는 세퍼릿 리얼리티 루트는 지상에서 200m 높이의 최고 난이도 8급(VIII+)의 직벽 등을 오른 후, 수평으로 7m의 길이로 공중으로 튀어나온 화강암 바위 루프(Roof / 지붕) 밑을 기어서 오버행 위로 오르는 난코스이다.

그러나 볼프강이 흔히 생각하듯 '무식하게'온사이트 프리 클라이밍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 등반의 사전준비로 여러 차례 로프의 확보를 받으며 이 루트를 인공등반 또는 프렌드를 이용하며 프리로 등정하며 암벽의 특징을 모두 살펴 암기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자일 없이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프리 솔로 클라이밍을 '자살행위'로 규정지었지만 그는 거뜬하게 등반을 성공하고 이후에도 요세미티, 파키스탄, 파타고니아 등지에서 기념비적인 등반을 성공적으로 마치고는 결국 세계적으로 프리 클라이밍의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이준 씨는 당시 그의 자유로운 산악활동에 대해서 사실 일본의 산악인 우에무라 나오미의 영향을 받은 탓도 있다고 말한다.

당시 우리나라 산악계는 역시 전설적인 산악인으로 꼽히는 일본의 우에무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학교 때 선배 손에 이끌려 우연히 산악부에 들어간 우에무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 대륙별 최고봉을 단독으로 세계 최초로 등반에 성공한다. 그 때 나이가 불과 20대였다.

등반비용이 떨어지면 캘리포니아의 농장에서 과일을 따면서 자금을 모았고 단독등반 금지 같은 제도로 막히면 그 제도가 풀릴 때까지 갖은 노력 끝에 해결해냈다. 그는 항상 '그저 산이 좋아서' 도전한 것이라고 겸손했다. 그의 등반형태는 대개가 단독등반이었던 탓에 산에서 만나는 크레바스를 피하기 위해서는 긴 장대를 등에 달고 다녔고 자신이 갈수 있는 만큼 엄청난 속도로 등반을 했다. 우에무라는 결국 30대의 한창 나이에 매킨리 단독 등정중에 실종되고 말았다.

등반을 마치고 식당 <인수봉 산꾼>에서 유부찌개와 소주를 한 병 시켜놓고 두 사람의 화려했던 등반사(登攀史)를 듣는다. 여러 달 동안 홀로 설악산에 들어가 울산바위를 등반하던 최 대장의 젊은 날과 프리 솔로 클라이밍으로 인수봉 산꾼의 지존을 가렸다는 이준 씨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우리의 길지 않은 현대 등반사에 이처럼 등반에 뜨거웠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운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산을 향한 그들의 몸짓은 결국 자유를 향한 몸짓이었으며 그들의 열정이 모여 결국은 자유로 상징되는 인수봉에 또 하나의 바윗길을 빚었으리라. 검악산악회를 대표하는 ‘검악B’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자유혼’이라는 시대의 정신으로… 이제 새롭게 정립된 검악B길이 이 시대를 등반하는 모든 클라이머들에게 더욱 사랑받는 바윗길이 되어주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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