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률 기자] 영하의 날씨가 시작되는 12월 초가 되면 주말에 그토록 붐비던 인수봉과 선인봉은 날씨만큼 썰렁하기 이를데 없다. 물론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1월1일에도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믹스 클라이밍으로 인수봉 등반을 한다지만 이미 영하를 넘나드는 쌀쌀한 날씨가 시작되면 바위와 함께 몸이 얼어붙어 제대로 된 등반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클라이머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산악회는 이른바 ‘쫑바위’를 통해 한해의 무사안전을 자축하면서 한겨울에도 따뜻한 암장을 찾아 겨울나기에 들어간다.
모처럼 따뜻한 날씨를 보인 12월2일, 북한산성입구 다음 정거장인 효자리에서 하차하니 효자리 수퍼에서는 손님들을 위해 드럼통으로 만든 난로에 불을 피우고 군고구마를 굽고 있었다. 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추운 등산객들을 위한 배려라고 하니 주인아저씨의 넉넉한 인심이 고마울 뿐이다. 뜨거운 불에 잘 익은 물고구마 껍질을 벗겨 한입 베어 무니 역시 그 맛이 일품이다.
잘 익은 고구마 두 개를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치우고 거석산방의 정은수 클라이머와 함께 둘이서 어프로치를 시작한다. 누가 나이를 물어보지 않는다면 50대 초반으로 보일 정도로 동안인 그는 어떤 순간에도 조급하지 않고 호쾌한 웃음을 잃지 않아 더욱 친근감이 가는 클라이머며 아직도 5.10급을 거뜬하게 선등하는 실력자이기도 하다.
오늘 등반은 ‘원효염초 리지’다. 한자어로는 암릉길을 이르는 리지는 ‘릿지’로도 많이 불리는데 리지(ridge)는 한 마디로 바위로 된 모든 능선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리지’하면 소규모의 바위능선으로 걸어서는 오르기 힘든 난이도의 바위 능선을 일컫는다. 그래서 ‘릿지꾼’이라든지 ‘릿지산행’ ‘릿지화’라는 정체불명의 단어들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원효염초 리지는 북한산 서북면에 위치한 원효능선을 따라 북한산의 최고봉인 백운대까지 이어지는 장쾌하고도 멋진 바윗길이다. 원효염초 리지는 북한산국립공원에서 가장 긴 리지 코스이자 인기 또한 높다. 능선길에 위치한 봉우리 중 대표적인 것이 원효봉(505m)과 염초봉(662m)이어서 원효염초 리지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원효봉 능선이 비교적 수월한 반면 책바위, 말바위 등이 있는 염초봉 능선길은 등반시 주의가 필요하다. 안전벨트와 헬멧, 자일 등 등반장비를 갖추고 경험자의 선등으로 등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취재팀은 효자리를 출발해서 호젓한 길을 따라 시구문까지 쉼 없이 밟아 올랐다. 시구문에서 가던 방향으로 직진하여 좌측으로 접어드니 그곳이 바로 ‘원효대슬랩’이라 일컫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이 나와 등반자의 안전장비를 체크한다. 장비를 갖추지 않은 등반자들은 이곳에서 ‘퇴짜’를 맞고 우회하여 몰래 원효봉을 오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전장비를 준비하면 저런 고생을 하지 않고도 당당하게 등반을 할 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게다가 장비 없이 몰래 출입금지 구간을 등반하다가 발각되면 벌금까지 물어야 한다. 예전에는 장비가격이 비싸서 그랬다고 하지만 이제는 취미활동을 하는데 큰 부담 없이 장비를 마련할 수 있는데 자신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하루빨리 안전장비를 준비할 것을 권고하고 싶다. 헬멧만을 써도 치명상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일반산행을 하는 산꾼들도 ‘원효대슬랩’을 자주 오르곤 했다. 처음 이곳을 마주치게 되면 왠지 오금이 저릴 정도로 슬랩은 길다. 쉬임 없이 오르려면 다리에 제법 힘이 들어간다.
원효대슬랩 끝나는 곳에 앉아 다리쉼을 하다보면 건너편으로 바라다 보이는 것은 의상능선이다. 의상봉은 신라시대의 고승 의상대사가 참선수도를 하였다고 해서 의상봉이라 이름붙여졌다. 의상능선은 의상봉 오른쪽 대서문에서 의상봉-용혈봉-문수봉 까지 약 3.5km의 성곽구간을 말한다.
의상능선은 등반을 하고 있는 원효능선과 마주서서 장쾌한 마루금을 빚어내고 있다. 원효와 의상은 동 시대를 살며 불교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던 큰 인물들이자 당나라로 유학을 가는 중에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라는 깨달음을 얻은 고승들이 아닌가.
원효봉 역시 원효대사가 수도했던 원효암에서 이름이 지어진 봉우리이니 이 두 사람은 우리 후손들이 북한산을 찾는 이상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원효염초 리지의 장점은 계속 시원하게 펼쳐지는 전망이다.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 원효봉, 염초봉, 장군봉, 의상봉 등 북한산의 주요 봉우리와 능선들을 직접 살펴볼 수 있다.
원효염초 리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등반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다가 바위가 나오면 잠시 등반을 하고 또 다시 보행산행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쉬엄쉬엄 오를 수 있기 때문에 초보자라고 해도 경험이 있는 선등자와 함께 하면 재미있고 또 안전하게 등반을 할 수 있는 매력이 있다.
능선을 계속 오르다가 디에드르(책을 펼쳐 놓은 듯 생긴 바위 또는 암벽)성 바위를 하나 오르고 어렵지 않게 원효봉에 이르게 된다. 사방이 탁 트인 가운데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을 감상하다가 성곽을 따라 계속 걸어서 내려가면 누각이 유실된 북문과 만난다. 그리고 이제 서서히 염초리지가 시작된다.
바윗길 중간에는 오래 전 바위에 계단을 만들어 놓은 곳을 발견할 수 있다. 계단을 만들 당시인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이 같은 배려(?)는 고마운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기자의 눈에는 심각한 자연의 훼손이요 ‘닥터링(등반의 편이를 위해 인공적으로 바위를 훼손하는 일)의 극치’로 보였다.
오른쪽으로 계속 노적봉을 보면서 능선을 걸어가다 보면 드디어 처음으로 직벽을 만나게 된다. 높이는 약 15미터에 이른다. 홀드는 무척 좋아서 난이도는 5.5 내외일 것으로 보이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홀드를 찾지 못해 추락을 하는 경우가 가끔 발생한다고 한다. 때문에 이곳에서는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이 등반자의 장비를 점검할 뿐 아니라 등반과정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직벽이 자신 없다면 오른쪽 크랙길로 우회할 수도 있다. 암벽등반을 하는 사람들에게 염초로 올라가는 직벽은 시시할 수도 있지만 외형상 가장 긴장감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 또 등반을 계속 이어나가 멀리서 직벽을 바라다보면 제법 그럴듯한 클라이밍의 장관이 연출되기도 한다.
취재팀의 앞에서 등반을 하는 팀은 등반자가 무려 9명이어서 양해를 얻고 중간에 먼저 통과한다. 너무 빨리 올라서일까 앞서 가던 여성 등반자가 막바지 구간에서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멈춰서있다. "천천히 오르시라" 권하고 멈춰서 기다리니 그제서야 다시 홀드를 찾아 등반을 이어 나간다.
직벽을 통과해서 다시 능선길로 접어들면 다시 원효봉의 전경과 직벽의 등반모습이 나타나면서 그럴듯한 그림이 되어준다. 이곳에서 등반자들의 사진을 찍으면 어렵지 않게 멋진 작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다시 '책바위'를 넘는다. 마치 책을 펼친 것 같이 생겼다 해서 책바위다. 오르는 것보다는 내려가는 것이 훨씬 더 힘들다. 바위 상단에 문고리 볼트가 달려있으니 이곳에 자일을 깔고 클라이밍 다운을 하면 더욱 안전할 것이다.
클라이밍 다운으로 하강해본다. 자주 와본 길이 아니어서 자연스러운 몸짓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펼쳐진 책의 양면을 손바닥으로 밀고 홀드를 잘 찾아 내려서다보니 제일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고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뒤 팀의 등반모습을 보니 자일을 깔고 안전하게 하강을 하고 있었다. 책바위의 오른쪽 바위모서리를 잡고 내려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염초봉을 지나면 염초봉 정상으로 오르는 바위 능선이 나타난다. 바위가 약간 얼어있어 미끄럽다. 곧이어 일명 '피아노 바위'가 나오고 이곳에서 자일을 걸고 약 5~6미터 정도의 높이를 하강한다. 오른쪽 바위모서리를 잡고 피아노 치듯 내려올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피아노바위라고 한다.
피아노바위를 지나면 왼쪽에 능선이 보이는데 이것이 파랑새 리지다. 알고 보면 북한산에는 다양한 리지가 있다. 파랑새리지의 정상은 장군봉이며 그곳에서 하강을 하게 되고 다시 원효염초 리지를 타고 백운대까지 오르는 경우도 있다.
말바위 직전에는 일명 '춘향이 바위'라고 불리는 독특한 형태의 바위가 있다. 여성의 은밀한 부위를 닮은 이 바위는 의미를 모르고 보면 아무렇지도 않지만 설명을 듣고 나면 새삼 겸연쩍어진다. 대낮에 여성의 비밀을 대놓고 감상하자니 축축한 바위가 민망스럽다. 예전에는 이곳에서도 등반을 했는지 문고리 볼트가 두 개 걸려있다. 암벽연습장으로 활용했던 모양이다.
건너뛸 수밖에 없는 뜀바위를 뛰어 넘으면 이제 원효염초 리지의 마지막 크럭스라고 할 수 있는 말바위가 등장한다. 바위가 말처럼 생긴 것은 아니지만 말등처럼 생긴 바위를 올라타서 넘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리라.
말바위 아래의 너른 바위 위에 눈이 내려 슬립을 먹으며 등반을 시작한다. 바위 모서리를 잡고 말바위의 머리 부근에 접근하면 낡은 슬링 줄이 하나 걸려 있다. 그곳에 임시로 확보를 하고 다시 말바위 아래쪽으로 몇 걸음 이동하면 볼트가 나온다. 짧고 긴 슬링이 걸려 있어 이곳에서는 인공등반으로 올라타서 말바위를 넘게 된다.
여성 등반자들이 많이 포함된 새로운 앞 팀은 말바위를 넘어서며 긴장들을 많이 하고 있다. 아무래도 출발지점도 미끄러운데다가 슬링을 잡고 바위를 올라타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완력이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곳은 바람이 세서 체감온도는 영하 5도 내외는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앞팀은 몇 번 미끄러지기는 해도 별다른 추락 없이 말바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말바위 넘어 다소 긴장이 되는 바윗길을 우리는 확보 없이 올랐고 그곳을 넘어서자 백운대를 바라보고 좌측사면은 눈으로 덮여 있어서 무척 미끄러웠다. 그리고는 이내 오늘의 목적지인 백운대에 도착하게 된다.
이날 10시에 효자리 수퍼를 출발한 취재팀은 11시부터 등반을 시작해서 오후 3시에 등반을 마쳤다. 원효염초 리지 등반에 소요된 시간은 3시간 정도. 앞팀에 막혀 밀리지 않았다면 그보다 훨씬 빨리 등반을 마쳤을 것이다.
원효염초 리지는 본격적인 등반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멋지고 아름답게 펼쳐지는 전망이 일품인 리지 코스다. 뿐이랴 직벽, 책바위, 뜀바위, 말바위 등의 다양한 바위를 넘고 내려서는 동안 바윗길의 새로운 매력을 느끼게 된다.
백운대에서 바라다 보는 인수봉은 역시 늠름하게 멋있기만 하다. 그리고 쌀쌀한 날씨에도 누군가 남측에서 하강을 준비하고 있다. 대단한 열정들이다. 바윗길은 그러한 열정들이 모여 함께 걷고 오름짓을 하는 곳이기에 항상 뜨겁고 새로운 기운이 넘쳐난다.
백운대를 지나 위문을 거쳐 산성입구로 하산을 한다. 빵과 떡으로 간단하게 점심을 마쳐서인지 갑자기 시장기가 밀려온다. “겨울에는 도루묵 찌개가 일품인데… 요즘 도루묵이 풍년이라는데 오늘은 도루묵찜이 어떨까요?”
등반후의 소박한 뒤풀이는 역시 등반의 또 다른 매력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도루묵 찜을 맛볼 수 있을까? 산성입구로 향하는 발걸음이 절로 바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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