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현대차를 만든 그 차, 쏘나타 역사①-스텔라(Y-1)의 등장

입력 2014-03-31 08:43   수정 2014-03-31 08:43


 현대자동차가 7세대 LF를 내놨다. 1983년 이후 7번 변신을 거치며 지금은 당당히 주력 차종이 됐다. 덕분에 현대차의 글로벌 브랜드 이미지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983년 'Y' 프로젝트로 시작된 쏘나타는 한국 자동차산업 근대사를 보여주는 차종이기도 하다. 작은 차에서 벗어나는 디딤돌이 쏘나타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본지는 쏘나타 역사를 통해 한국차의 현대사를 되돌아 봤다. <편집자>

 쏘나타 성공 신화의 모태는 사실 이전 스텔라로 알려진 Y카 자동차다. 83년 등장한 Y카는 현대가 쏘나타를 만들어 내게 된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차종이다. 1978년 현대는 이탈디자인의 주지아로에 의뢰해 Y카 스타일을 완성했다. 4년간 270억원이 투입된 Y카는 당시 불황과 적자에 시달리던 현대 입장에선 애초부터 무리한 계획이라는 비판이 많았다. 게다가 중형차는 품질의 고급화를 이뤄내야 하기에 내부적으로 과연 이 계획이 가능하겠냐는 비관적인 전망도 뒤따랐다. 






 그럼에도 현대가 중형차를 개발키로 한 것은 포드와의 기술제휴로 생산한 코티나 시리즈에서 당한 뼈아픈 기억 때문이다. 1969년부터 생산이 시작된 코티나 시리즈는 우리 고유모델이 아니었던 이유로 포드측의 모델변경 요구에 수동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80년까지 모델 평균 수명이 3년을 넘기지 못하는 처지였다. 이에 당시 故 정주영 회장은 포드의 기고만장함에 더 이상 끌려 다닐 수 없다는 의지를 나타냈고, 현대로 하여금 독자 개발이라는 길을 걷게 했다.

 그 결과 마침내 1983년 1월 Y카가 등장했다. 스텔라(STELLAR)로 알려진 Y카의 차명은 라틴어 'Stellaris'에서 유래한 말로, '별의, 별 같은, 우수한, 일류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현대는 스텔라에 1,400㏄와 1,600㏄ 두 가지 엔진을 탑재해 시장에 내놓았다. 각각의 엔진은 92마력과 100마력을 발휘했는데, 여기에 공기저항을 최소화하는 쐐기형 디자인을 기본으로 앞 유리면 경사를 가능한 낮게 설계했다. 또 주행 시 좌우요동을 방지하고 노면 접지력을 높여 주행안정성과 승차감을 크게 향상시켰다. 특히 공기역학적 개념이 도입돼 최고속도나 가속성능, 연료효율 등 주행성능이 최대 10% 정도 향상되는 성과를 거뒀다.

 이전 코티나 시리즈에서 가장 불만스러웠던 엔진문제를 해결했다는 점도 스텔라의 완성도를 높여주었다. 현대는 기획 단계부터 Y카에 미쯔비시 새턴엔진 시리즈의 4G32 엔진을 탑재하기로 하고, 이미 기술제휴에 의한 국산화를 조기에 달성하고 있었다. 이 4G32 엔진은 높은 내구성, 낮은 연료소모, 100마력의 고성능 등 코티나 시리즈가 갖고 있던 엔진결함 요인을 말끔히 씻어내 주기에 충분했다.






 섀시 면에서도 이론적으로 가장 우수한 매커니즘을 채택했을 뿐 아니라 국내의 기후, 도로조건 및 운전자의 습관과 성격 등을 고려한 종합적인 개념이 적용돼 안전도와 성능은 물론 내구력에서도 크게 돋보였다. 이밖에 직접 접착식 전후면 유리, 일체성 형식 천장 및 도어 트림, 특수조절이 가능한 고급시트 등 각종 최신 매커니즘과 엔지니어링을 과감하게 도입해 품질 고급화에 커다란 성과를 거뒀다. 

 포니2를 앞세운 판매회복세가 계속되던 83년 3월15일 현대는 포드와의 기술제휴로 생산하던 코티나 시리즈의 마지막 차종인 마크Ⅴ 조립계약을 종결했다. 2개월 후인 5월 31일 현대는 ‘Y카’라는 닉네임으로 일반의 관심을 얻었던 국내 최초의 중소형 고유모델 스텔라 신차발표회를 신라호텔 다이너스티룸에서 성대하게 열었다. 포니에 뒤 이은 고유모델 제2호차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출시되자마자 스텔라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계약을 시작한 6월1일 이후 3개월 만에 계약고가 이미 1만대 수준을 넘어서, 생산이 도저히 주문을 따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좋은 일에는 언제나 불운이 따르듯 잘 나가던 스텔라였지만 급박한 생산일정으로 결함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포드와의 계약만료를 의식해 양산일정을 무리하게 잡다보니 완성차 테스트에 완벽을 기하지 못했던 탓이다. 이로 인해 소비자들의 불만은 높아갔고, 신뢰 또한 추락했다. 심지어 출고 후 3-4개월이 지나면서 화재발생, 소음, 볼 조인트 소켓 불량, LPG 택시 가스배관 위치 등 품질상의 결함이 드러나 리콜 캠페인을 벌여야 했다.

 이 때 현대가 가장 곤욕을 치른 사건이 하나 벌어진다. 차 속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한 것이었는데,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현대는 차량을 정밀 조사해 그 원인이 전기 합선에 있음을 알아냈다. 이에 현대는 83년 겨울 이미 판매된 스텔라 1만5,000여대의 대규모 리콜을 실시해 배터리 배선을 개선했다. 그럼에도 이미 품질로 인한 소비자들의 신뢰는 추락한 상태였다. 결국 스텔라는 84년 내내 월 판매량이 1,300여대를 맴돌며 현대에게 아픈 상처를 남기는 애물 차종이 되고 말았다.






 현대차는 스텔라의 초기 품질문제를 계기로 품질개선 노력을 배가하게 된다. 아울러 초기 품질하락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85년 배기량을 100㏄ 높인 스텔라 CXL을 4월에 출시했다. 품질을 크게 개선한 만큼 배기량도 바꿔 이미지 전환을 노린 셈이다. 물론 현대의 전략은 적중했다.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중형차 성격을 가졌던 스텔라는 아펙스(APEX), GL, GX 등이 추가되며 삽시간에 국내 중형차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하게 된다. 품질에 대한 불신을 품질 향상으로 극복한, 정공법이 성공한 셈이다. 

 확실한 스텔라의 시장 안착에 고무된 현대 상품팀은 내친 김에 스텔라를 활용한 고급 중형차 개발을 검토하게 된다. 스텔라를 중형차로 내놓았으나 배기량 1,500㏄로는 당시 대우 로열 시리즈가 확고하게 자리한 진정한 2,000㏄급 중형차의 상대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현대는 85년 11월, 스텔라 최고급 개량형으로 1,800㏄와 2,000㏄급 '소나타(SONATA)'를 내놓았다. Y-1카로 불리운 '소나 타는 차'의 최초 등장이 바로 스텔라의 최고급형 버전이었던 셈이다. 

 <2편에서 계속>

 권용주 기자 soo4195@autotimes.co.kr

▶ [기획]현대차를 만든 그 차, 쏘나타 역사②-'쏘나타(Y-2)'의 시작
▶ [기획]현대차를 만든 그 차, 쏘나타 역사③-쏘나타Ⅰ의 흥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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