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가 7세대 LF를 내놨다. 1983년 이후 7번 변신을 거치며 지금은 당당히 주력 차종이 됐다. 덕분에 현대차의 글로벌 브랜드 이미지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983년 'Y' 프로젝트로 시작된 쏘나타는 한국 자동차산업 근대사를 보여주는 차종이기도 하다. 작은 차에서 벗어나는 디딤돌이 쏘나타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본지는 쏘나타 역사를 통해 한국차의 현대사를 되돌아 봤다. <편집자>
쏘나타는 스텔라의 기본차형에 국내 최대 배기량인 1,997㏄ 시리우스 엔진을 달아 출력을 높이고, 자동 정속주행장치, 파워핸들, 파워브레이크, 자동조절 시트, 전동식 리모컨 백미러 등 각종 첨단 전자 장비를 채택해 운전 편리성과 승차감을 극대화 된 모델이었다. 또한 연비향상과 주행안정성을 높여주는 5단 기어가 장착됐고, 충격흡수식 범퍼와 신형 라디에이터 그릴, 크롬도금 몰딩류, 이중접합 안전유리, 전조등 세척기 등 최고급 승용차로 부각될 수 있는 기능은 거의 모두 포함됐다.
그러나 중형 시장의 고급화란 특명을 받고 태어난 Y-1은 결과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스텔라의 최고급 버전으로 출시됐기 때문이었다. 이미 스텔라 배기량 1,500㏄에 익숙해 있던 소비자들로선 굳이 돈을 더 주고 스텔라와 크게 다르지 않은 차를 비싸게 구입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게다가 국내 소비자들은 큰 차체에 작은 배기량을 선호하는 특성을 갖고 있었기에 쏘나타는 별 다른 인기를 얻지 못했다. 아울러 '스텔라=1,500㏄'로 이미지가 고정화 된 상황에서 고급형이 나왔다 해서 갑자기 이미지마저 고급스럽게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텔라 판매호조로 자신감을 가졌던 현대로선 적잖이 당황했다. 내심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터에 시장의 반응이 싸늘하게 나오자 무엇이 문제인 지 파악에 들어갔다. 결국 현대는 스텔라와 쏘나타가 차별화되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냈고, 경영진의 지시로 개발팀은 새로운 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당시 Y-1 개발에 참여했던 모 임원은 "스텔라 판매량이 괜찮았고, 소비자들도 보다 중형차가 고급스러워지기를 원했던 데 맞추어 소나타를 만들어 내놓았는데, 반응은 냉랭했다"고 전한다. 그는 현대 내부에서조차 이처럼 차가운 기운이 감돌 것이라곤 예측하지 못했다며 이를 보고 당시 정세영 전 회장은 중형차 계획의 전면 재검토를 일선에 지시했다고 전한다.
'소나 타는 차(?)' Y-1의 실패는 무엇을 의미했을까. 쏘나타의 실패는 당시 현대로선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포니와 엑셀, 스텔라로 이어지는 승용 제품이 번번이 성공을 거둔 데 반해 중형 이상 고급차는 여간 시장 진입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시험 삼아 출시해 보았던 쏘나타마저 시장의 외면을 받자 현대 경영진은 다급해졌다. 더욱이 일본차가 이미 해외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때여서 수출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생존이 어려울 수 있다는 위기감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수출 전략형 중형 세단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특히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일본차와 경쟁하려면 소형차로는 어림도 없다는 게 경영진의 생각이었다. 이미 값싼 소형차로 나름의 시장진입은 이뤘지만 풍요로운 미국에서 소형차 규모는 중대형에 비해 보잘 게 없었고, 결국 미국 내 자동차 판매를 위해선 중형차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현대는 이 같은 생각을 바탕으로 새로운 중형차 개발에 들어갔다. 개발 목표는 크게 세 가지로 정했다. 첫째는 새로운 구동방식과 일본차에 비해 낮은 가격, 그리고 로열 시리즈보다 앞서는 상품성이었다. 당시 국내에서 중형차는 모두 뒷바퀴 굴림 방식이었다. 당초 Y-2 또한 스텔라 섀시를 개선해 뒷바퀴 굴림(FR)을 사용한다는 방침이었으나 이것만 가지고는 성공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 설계 개념을 완전히 바꾸었다. 특히 Y-2를 수출 전략형으로 만들기로 한 이상 전 세계 자동차시장에서 호평 받고 있는 중형차들이 하나같이 앞바퀴 굴림(FF)이었던 점도 설계 변경의 주 요인이 된 것이 사실이다. 결국 현대는 그간 뒷바퀴 굴림 개발에 투자한 시간과 돈을 과감히 버리고, 85년 4월부터 앞바퀴 굴림 차종 개발을 적극 검토하기 시작했다. 약 20일간의 검토 끝에 그해 5월9일부터 앞바퀴 굴림 개발을 위한 새로운 스타일링 작업이 시작됐다.
현대는 Y-2카 개발에 앞서 해외 시장도 철저히 조사했다. 개발의 첫 번째 목표가 북미 시장에 대한 효과적인 공략에 있었기 때문에 해외시장, 특히 미국시장에 대한 세밀한 조사가 선행됐다. 수출본부 인력을 대거 투입해 미국 시장의 중형차 판매추이와 수요예측 작업을 진행했는데, 조사 당시 미국 시장은 중형차를 포함한 전체 자동차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시기였다. 특히 Y-2의 목표시장인 이른바 '로어 미들(Lower-Middle)'급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다. 현대로선 로어 미들 시장의 규모에 비춰 소나타를 내놓을 경우 가격 경쟁력만 있으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즉, 중형급 중에서도 저렴한 차종을 원하는 소비자를 효과적으로 공략한다면 어느 정도의 점유율을 가져갈 수 있다고 예측한 것이다.
한편, 미국시장과 함께 내수시장에 대한 조사도 동시에 진행됐다. 당시 국내 자동차 시장의 중형차 비율은 해마다 증가세였다. 82년 24%였던 중형차 비율이 85년에는 37%까지 높아져 국내 소비자들의 고급화 추세를 그대로 반영했다. 이른바 자동차 대중화 바람으로 알려진 모터리제이션(Motorisation)이 일기 시작한 것도 이 때다. 이와 맞물려 국내 중형 시장은 대우 로열 살롱(Royal Salon)이 주도하고 있었다. 현대가 Y-2 개발 목표 가운데 상품성을 하나로 정한 것도 결국 대우 로열 시리즈와 필적하기 위해서였다. 제 아무리 수출 전략형이라 해도 수출보다 내수 판매 비중이 높았던 때여서 국내에서 입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안 되는 시기였다. 따라서 국내에서 대우 로열 시리즈를 넘지 못하면 중형 고급세단 시장은 진입 자체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물론 그렇다고 내수시장만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현대는 포니와 엑셀로 애써 개척해 놓은 북미 시장의 판매력 유지를 위해 당장 제품라인업 확대가 필요했다. 달랑 소형차 한 두 대 만으로 미국 내 딜러들의 이탈을 계속 잡아놓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또 중형차로 이미지를 올리지 못하면 미국 내 시장 점유율을 늘리는 데 한계가 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미국의 경우 국내와 달리 자동차판매는 개인사업의 영역에 속한다. 따라서 딜러는 팔릴 만한 차종에만 승부를 거는 경향이 강하다. 이들 딜러의 뒷받침 없이는 절대 미국 내 자동차 판매를 성공할 수 없다. 그런데 미국 내 딜러들은 현대 소형차로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없었다. 게다가 미국 내 딜러는 한 회사의 차종을 파는 단일 대리점이 아닌, 여러 수많은 브랜드 차종을 판매하는 양판형태의 딜러여서 현대 외에 일본 및 미국차도 판매했다. 저가 차종 한 대보다 고가 차종 한 대 파는 게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딜러들이 팔 수 있는 판매차종 확대는 더욱 절실했던 셈이다.
이런 여러 가지 조건과 요인을 파악한 현대 개발팀은 85년 Y-1 실패를 쓴 잔 삼아 Y-2 개발에 착수했다. 현대의 첫 수출 전략형 중형세단, 지금의 현대자동차를 글로벌 기업으로 탈바꿈 시키게 된 차종의 개발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개발팀은 우선 Y-2의 컨셉트를 고급 중형세단으로 정하고, 무엇이 가장 필요한 지 조사를 했다. 그 결과 국내에선 실내 공간 확대를 요구하는 소비자들의 기대가 높았고, 미국에선 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중형 세단을 원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개발팀은 Y-2로 북미와 내수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을지 우려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두 조건을 모두 만족시켜야 했다. 두 지역의 소비자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고, 성향도 달랐지만 둘 사이의 최대 접점을 찾아내는 게 이들의 임무였다.
현대는 내수용과 수출 전략형의 차이를 배기량으로 정했다. 내수용은 1,800㏄와 2,000㏄로 승부를 걸고, 수출은 2,400㏄급으로 맞서기로 했다. 미국의 경우 휘발유 등이 풍부해 소나타 차체에 2,000㏄급 배기량은 지나치게 적은 크기였고, 반면 국내에서 2,400㏄는 지나치게 비대한 배기량이었다. 국내 소비자는 큰 차체, 적은 배기량을 선호했지만 미국은 차체가 작아도 배기량은 커야 자동차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수용 쏘나타는 여전히 2,000㏄급이 주력이고, 수출용은 2,400㏄가 주력이다. 그나마 지금은 국내에서도 2,400㏄급이 간혹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나 당시만 해도 소나타 2,400㏄의 국내 판매는 1년에 10대 정도가 고작이었다.
쏘나타 개발에서 가장 특징적인 점은 기존 국산차와 달리 디자인과 설계 등을 모두 현대 기술진이 완성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쏘나타는 실질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독자모델이라고 평가를 받고 있다.
현대는 우선 당시 세계 스타일링의 흐름에 따라 공기역학을 중시한 에어로 다이내믹 타입을 추구했다. 아울러 현대로서는 첫 시도로 기록된 차 앞쪽이 아래로 내려오는 모양의 노즈 다운(Nose-down) 스타일을 더했다. 여기에 인테리어는 인체공학적인 측면을 최대한 고려해 사람들이 몸으로 느끼는 감성품질을 다듬었다. 엑셀과 스텔라의 수출경험을 살려 컬러 콤비네이션도 적절하게 맞추었다. 이렇게 최첨단 스타일을 서둘러 적용한 결과 당초 1986년 2월말까지로 잡혀 있던 디자인 완성 일정은 3개월 앞당겨진 1985년 11월말에 완료됐다.
스타일링이 완성된 후 1985년 12월부터 시작된 설계는 1년여 만에 마무리됐다. 현대는 설계과정에서 컴퓨터를 이용한 차체구조 설계를 활용했는데, 특히 설계에 CAD를 적용한 것은 엑셀부터지만 차체구조 설계에까지 컴퓨터를 이용한 것은 Y-2가 처음이었다. 완벽한 중형세단 개발에 초점을 맞추었던 터라 당시로선 최첨단 설계를 진행했던 셈이다.
설계가 끝나자 1986년 4월부터 시작차(試作車) 제작에 들어갔다. 총 62대의 시작차는 설계보완 및 개발테스트를 목적으로 제작됐으며, 1987년 3월부터 1988년 7월까지 계속된 개발시험의 총 주행거리는 103만8,000㎞에 달했다. 1년도 채 안되는 기간에 100만㎞ 이상을 달려 내구성과 설계 및 품질의 문제를 잡아내는 데 주력했다.
당시 경영진은 쏘나타가 주출 주력차종임을 들어 현지 시험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현지시험은 10대의 쏘나타와 함께 도요타 캠리 및 혼다 어코드 등의 일본차와 비교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최저 영하 40℃의 캐나다 한지(寒地)테스트, 최고 영상 42℃의 미국 고온테스트, 해발 1만마일 높이의 고지(高地)테스트, 그리고 시내도로와 비포장도로 주행시험 등 8만㎞의 현지 시험이 차례대로 실시됐다. 이밖에 실내에서 배기가스나 충돌 등 법규인증을 위해 실시하는 동력계(Dynamometer) 내구시험을 180만㎞ 이상 실시하기도 했다. 현대로선 판매 후 발생할 수 있는 품질문제를 시험단계에서 최소화, 제품력을 입증한다는 노력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오랜 시험을 거쳐 쏘나타는 드디어 세계 어느 시장에 내놓아도 안전도나 환경 규제치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는 차로 태어나게 됐다. 스타일링을 시작한 지 3년 2개월만인 1988년 6월 마침내 오랜 산고 끝에 포니와 엑셀을 잇는 현대자동차의 주력 수출전략차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당시 쏘나타 개발에 든 비용은 37억1,787만원, 총소요 연인원은 29만2,343명에 달했다. 또한 쏘나타 개발에 따라 연산 30만대 규모의 제2 승용공장 건설에 2,007억원, Y-2 조립부문에 214억원, Y-2 공작부문에 1,208억원, Y-2 생산용 승용 시트공장 건설에 86억원 등 무려 3,000억원을 투자했다. 쏘나타 한 차종을 위해 기하급수적인 비용을 감수하며 회사의 사활을 걸었던 셈이다.
한편, 애초부터 수출 전략형 중형차로 개발된 쏘나타는 차명 선정과정부터 미국시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현대는 Y-2 개발이 마무리되면서 전 사원을 대상으로 차명을 공모했다. 당시 총 120개 응모작 중 '퀘스트라(Questra)', '쏘나타(sonata)' 등 6가지가 최종 후보에 올랐는데, 현대는 Y-2가 수출 전략형인 만큼 해외딜러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해 미국 현지법인(HMA) 및 미국 전역에 있는 240명의 딜러들에게 의견을 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이 '쏘나타'를 지목했다.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좋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담당자들은 난색을 표명했다. 쏘나타라는 이름은 이전 스텔라시리즈의 한 모델에 사용했던 이름이고, 또 품질 문제로 '소나타'가 '소나 타는 차'로 이미지가 굳어져 한글 표기마저 '쏘나타'로 바꾼 마당에 앞바퀴 굴림에 첨단엔진을 장착한 혁신적인 차에 사용할 경우 국내 고객들에게 신차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지장이 있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해외의 경우 배기량 등급별로 이미 고객의 머리 속에 각인된 종전 차명을 동급차량에 그대로 계승해 나가는, 이른바 '동급별 브랜드의 단순화'를 시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게다가 새 차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면 소비자들이 다른 상표와 차별화 된 이미지를 인식하도록 하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모돼 기존 브랜드를 사용하는 대신 그 이미지를 개선 또는 혁신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었다. 물론 해외 딜러들은 '쏘나타'를 요구했다. 새로운 차명을 사용할 경우 제품 인지도 제고에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결국 차명을 놓고 고민해 오던 현대는 해외 딜러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국내 최초로 '동급별 브랜드의 단순화' 개념을 적용해 마침내 새로운 차명을 '쏘나타'로 결정했다.
3편에서 계속
권용주 기자 soo4195@auto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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