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재 기자 / 사진 조희선 기자] “나이가 들수록 축복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감히 고백하건대 배우 장서희에 대한 작은 편견이 있었다.
사실 이런 오해는 작품에서 악역을 맡은 이의 얼굴에 계란을 던지고, 파 줄기로 머리를 가격하던 옛 시절 웃지 못 할 이야기의 연장선이지만, 연예인을 만나는 창구가 안방극장과 영화관으로 한정되는 대중으로서 작품과 배우를 떼놓고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시청자들이 장서희의 대표작을 떠올리기 위해 오른손을 활짝 펼쳤을 때, 엄지에 해당되는 작품은 단연 MBC ‘인어 아가씨’다. 여기서 그는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한 일념으로 평생을 살아온 은아리영을 연기했고, 화를 이기지 못해 깨진 유리병으로 자해를 시도하거나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새 어머니의 뺨을 때리는 등 현재의 시각으로도 참 독한 인물을 공연했다.
뿐만 아니다. 이후 SBS ‘아내의 유혹’, KBS ‘뻐꾸기 둥지’를 통해서도 장서희의 센 연기는 계속 됐고, 그와 극중 인물의 이미지를 연관시키는 편견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가운데 그는 “그간 ‘센 내용의 드라마’를 많이 했다. 이제는 그것을 벗어나 다양한 이야기를 경험하고 싶다”며 고민을 내비쳤다.
“배우 장서희가 아닌 제가 연기하는 극중 인물을 향한 손가락질이었지만, 복수극을 할 때 악플이 참 많았다. 재작년 MBC 주말드라마 ‘엄마’를 시작으로 조금씩 제 나이에 맞는 부드러운 이미지로 변신 중이다.”
연기 인생의 대표 키워드인 복수라는 이음절로 참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이제는 배우로서 더 많은 인물을 경험하고 싶다는 장서희. 바람은 때로 주변의 환경에 부딪히고, 처음의 의지가 소진되며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머릿속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고, 그 꾸준함을 보여주는 작품이 2월24일 개봉한다. 영화 ‘중2라도 괜찮아’다.
‘아들 바라기’ 엄마와 사춘기 자녀의 갈등과 화합을 그리는 이번 작품에서 장서희는 ‘중2 병’ 걸린 아들 때문에 골치 아픈 태권도 선수 출신의 엄마 양보미 역을 맡아, 아들 우한철을 연기하는 배우 윤찬영과 모자(母子) 호흡을 맞췄다. 윤찬영은 SBS ‘육룡이 나르샤’ 및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연기했던 베테랑 아역이다.
“저 또한 아역으로 연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같은 아역의 길을 걷고 있는 (윤)찬영이한테 눈길이 간다. 찬영이가 촬영 중간 많이 졸더라. 학업을 병행했기 때문에 졸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선 ’잠 많이 자고, 우유 많이 먹어서 키 커야 된다’고 말해줬다. 바쁜 촬영으로 수면 시간이 적어지면 성장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다행히 저희 어머니가 수업을 빠질 만큼 바쁜 와중에도 수학여행이나 소풍은 꼭 보내주셨다. 친구들과 기념 사진도 찍었는데 여전히 기억에 많이 남는다. 찬영이한테 되도록 아이들과 소통하고, 연예계 친구들보다 학창 시절 친구들을 많이 만들라고 말해줬다.”
장서희와 엄마. 처음이 아니건만 분명 연결고리가 익숙한 조합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에게 익숙한 것이 꼭 정답은 아닌 법. 인터뷰 내내 그는 낯선 옷을 입은 어색함 대신, ‘중2 병’ 자녀를 둔 엄마를 연기하는 행복함을 하이 톤의 웃음과 보는 이를 행복하게 만드는 미소로 드러내 취재진의 마음에도 행복 바이러스를 퍼뜨렸다.
“그간 맡았던 역할들이 참 강했다. 촬영할 때 매번 긴장하고, 대사할 때 힘을 줘야 했다. 익숙함을 벗어나 영화 ‘사물의 비밀’이나 SBS ‘산부인과’처럼 저를 대표하는 이미지와 상반되는 작품들에도 출연했지만 대중은 잘 기억하지 못하더라.”
“영화계에는 제 프로필이 아직 많지 않으니까, 크고 작은 영화를 떠나서 일단 좋은 시나리오가 오면 도전을 해왔다. ‘중2라도 괜찮아’는 그 과정에서 만난 행복한 영화다. 오랜만에 연기하는 발랄한 인물이기도 하고, 너무 재밌게 찍었다.”
“물론 사춘기 자녀를 키우는 엄마를 연기한다고 해서 긴장감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편했다. 양보미의 트레이드 마크인 사과 머리를 감독님이 제안해주셨던 것처럼 주변 배우들에게도 엄마 연기를 위한 많은 도움을 받으며 영화를 촬영했다.”
촬영이 즐거웠다는 표현은 영화를 소개키 위한 의례적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연기 경력 30년 이상의 배우를 마주하는 기자의 긴장감을 편안함으로 용해시킬 정도로 장서희의 웃음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무더위에 지쳐 곤란을 겪었을 법한 지난해 여름을 오히려 추억하고 싶은 순간으로 떠올리는 그를 향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질문했다.
“이경영 선배님이 연기하신 백운도사와의 장면이 좋았다. 백운도사가 양보미에게 어린 시절 사진을 보여주는데, 다른 누구의 사진이 아닌 제 어렸을 때 사진을 보여준다. 아버지가 찍어주셨던 사진인데 그때가 생각나면서 순간 뭉클해졌다.”
“아들이 엄마에게 뽀로로 시계를 선물하는 장면도 좋았다. 정말 저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몰입했다. 촬영 당시 뽀로로 시계가 과거 아역이었을 때의 감정을 상기시켰고, 동시에 아역인 (윤)찬영이를 마주하니 묘한 감정이 들었다.”
엄마를 연기하지만 장서희는 아직 인생의 반쪽을 만나지 못한 상태다. ‘중2 병’ 아들을 키우는 엄마를 연기하기 위해 학창 시절 친구들이 해주는 얘기를 교재 삼았다는 그는 결혼에 관해 아직은 멀게만 느껴지는 일이라고 말했다.
“저는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없으니까 자녀를 가진 중고등학교 친구들과 연락을 나누는 것도 공부가 된다. 친구들이 자녀들을 웬수라고 부른다. 물론, 그 속에는 따뜻함이 있지만 보면 맨날 싸운다고 한다. 가정을 이루고 엄마가 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저는 지금에 만족한다. 열심히 일하는 이대로가 좋은 거 같다. 독신주의자는 아니지만 결혼을 서두르거나, 결혼을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다.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친구들을 보면 그때 느꼈던 감정이 오래 못 가는 성격이다. 혼자 오래 있다 보니까 자유로움을 찾게 된다.”
마지막으로 장서희는 앞으로도 배우라는 일을 계속하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연예인의 피곤함을 토로하면서도 그를 사랑해주는 팬들을 위해 지금도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지금에 감사함을 느끼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모습에서 배우 장서희의 진가가 드러났다.
“연예인은 사람 때문에 지친다. 누구를 만나는 것이 아닌, 댓글이나 보여지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 저도 ‘중2라도 괜찮아’ 언론시사회를 위해 다이어트를 했다. 요새 걸핏하면 ‘변하지 않는 미모’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게 그렇게 부담될 수 없었다.”
“11살 때부터 이 일을 시작했기에 할 줄 아는 것이 연기 밖에 없다. 다행인 점은 저는 연기가 참 재밌다는 것이다. 이렇게 재미를 느끼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나이가 들수록 ‘내가 축복 받았구나’라는 생각이 드니까 계속 이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스크린에 ‘복수는 나의 것’으로 시작되는 박찬욱 감독의 ‘복수 트릴로지’가 있다면, 브라운관에는 ‘인어 아가씨’를 비롯한 장서희의 ‘복수 3부작’이 있다는 우스갯소리처럼 그의 연기 뿌리에는 복수가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늘 변화를 탐구한다. 더군다나 예술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배우라면 늘 새로움을 갈구할 수 밖에 없다.
은아리영부터 점 찍고 나타난 민소희까지. 카타르시스가 컸던 것은 인정하는 바지만, 올해는 ‘인어 아가씨’가 15주년을 맞는 해이다. 자그마치 15년. 이제 복수는 장서희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舊) ‘복수 여신’ 장서희는 이제 현(現) ‘아들 바보’로서 대중을 만날 채비를 마치고 새로운 연기의 설렘을 만끽 중이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 신사동 한 음식점에서 가졌던 약 60분의 인터뷰가 끝나고 회사로 복귀하는 길. 대담(對談) 시작에서 가졌던 편견은 어느새 사라졌는지 자취를 찾을 수 없었지만, 대신 보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엄마 장서희에 대한 기대였다.
한편 영화 ‘중2라도 괜찮아’는 24일 IPTV와 디지털 케이블TV에서 최초 개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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