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주 기자] 이병헌은 단언컨대 역시 이병헌이었다.
충무로뿐 아니라 할리우드까지 활동 영역을 넓힌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연기파 배우 이병헌. 그는 1991년 대하드라마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를 통해 연기 경력을 시작한 후 1992년 드라마 ‘내일은 사랑’에 출연하며 수려한 외모와 출중한 연기력으로 청춘스타 반열에 올랐다.
이후 ‘달콤한 인생’ ‘그해 여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내부자들’ ‘마스터’ 등 장르를 막론한 다양한 영화에서 섬세한 감정연기와 폭발적 에너지를 뽐내며 최고의 연기파 배우로 등극한다.
2009년에는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며 전 세계로 활동 영역을 넓힌 이병헌이 올해 영화 ‘싱글라이더(감독 이주영)’를 통해 또 한 번의 인생연기를 예고하고 있다.
‘싱글라이더’는 증권회사 지점장으로서 안정된 삶을 살아가던 한 가장이 부실 채권사건 이후 가족을 찾아 호주로 사라지면서 충격적인 비밀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이병헌은 한 가정의 가장인 강재훈 역을 맡았다.
이와 관련해 최근 bnt뉴스와 진행된 인터뷰에서 만나본 이병헌은 영화 속 그의 섬세한 감정 연기처럼 기자의 질문 하나 하나에 본인의 감정을 밀도 있게 전했다. 진정성이 담긴 그의 눈빛은 덤이었다.
Q. 오랜만에 감성드라마 장르의 영화를 선보이셨어요.
(보시는 분들의) 장르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어요. 근데 누구한테는 ‘싱글라이더’가 인생영화가 될 수 있다고 분명히 생각해요.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흥행을 떠나서 이런 점에서 영화를 선택하게 되었어요. 이 영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고, 또 한 번 똑같은 상황이 주어져도 같은 선택을 할 것 같아요.
Q. 시사회 때도 그렇고 시나리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신 것 같아요.
시나리오가 주는 전체적인 감성과 정서, 그리고 시나리오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 완성도까지. 잘 만들어진 문학 작품을 보는 것 같이 거의 완벽에 가까웠던 시나리오였어요. 또 이런 장르에 대한 목마름도 있었죠. 우리나라 영화 장르자체가 막연하게 한쪽으로 쏠려 있잖아요. 나도 모르게 ‘와~ 범죄영화가 글들을 기가 막히게 쓰네’라고 생각하면서 작품을 찍다가 이 시나리오를 받는 순간 ‘아 맞다! 내가 원래 이걸 좋아했었지’하는 생각이 어느 순간 문득 들었던 것 같아요. 특별히 가리는 작품이거나 선호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역시 나는 아주 섬세한 감성을 다룰 때 (이런 장르를)훨씬 더 선호하고 있었구나’ 했었어요.
Q. 그래서 공동제작에 참여했던 거군요.
아 그건 손석우 대표(BH엔터테인먼트)가 했던 거였어요. 영화를 찍으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형 여기 투자에 참여하자”고 말하더라고요. 그 마인드 자체가 너무 좋았어요. 만약에 ‘광해’나 ‘마스터’ 같은 영화를 말했다면 ‘아휴 너도 참 돈을 벌어야 되겠구나’라 했을 것 같아요. 처음으로 이런 쪽의 영화에 투자를 하겠다고 선뜻 말한 부분이 좋아서 저도 그 생각에 동의했죠.
Q. 흥행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호불호가 갈리는 게 어중간하게 그냥 괜찮다고 좋아해서 흥행 성적을 내는 것보다 전 이게 훨씬 좋은 것 같아요.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려서 흥행이 안 되더라도 어떤 이들에게 꼭 인생영화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사실 ‘달콤한 인생’이나 ‘번지 점프를 하다’도 흥행을 했다고 볼 순 없는 영화들인 것 같아요. 오히려 극장에서 내리고 나서 더 말들이 많았던 영화였죠.
Q. 기러기 아빠인 강재훈이라는 현실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공감하기에 조금 어려웠을 것 같아요.
오히려 특별한 직업을 가졌던 ‘내부자들’의 안상구나, ‘마스터’의 진회장같은 캐릭터들보다 다가가기가 훨씬 더 편했어요. 내 안의 다른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자아가 둘이라 해서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하나는 평범한 내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측면 때문인지 인물의 상황과 감정이입에 있어서 어려운 점은 없었어요.
Q. 이주영 감독님도 매 신마다 걸음걸이까지 다르게 해서 열연해주셨다고 칭찬하셨어요.
감독님이 과하게 칭찬을 해주신 것 같아요.(웃음) 그렇게까지 계산해서 연기하진 않았어요. 이건 어느 배우나 마찬가지일 거예요. 기본적으로 인물이 가져야할 감정을 잘 유지해야만 감독님이 의도했던 것을 관객들에게 제일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해요.
Q. 영화 속 대사가 거의 없어서 표정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요. 이런 와중에 감정을 유지했던 방법이 있으신가요?
다른 영화에 비해 (‘싱글라이더’) 이야기가 짧고 감정 선의 라인이 단순한 편이에요. 그 감정상태의 라인이 늘 머릿속에 있다면 전후 장면들은 상관없이, 어느 지점을 촬영하던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감정의 연결들을 잘 맞춰가면서 연기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인 거죠.
Q. 재훈을 연기하면서 이 시대 가장들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아요.
내가 강재훈 역할을 연기했기 때문에 조금 더 강재훈이라는 인물에 더 감정이입을 하고, 캐릭터에 젖어들려고 애썼어요. 하지만 재훈만 상처가 있는 것은 아니죠. 결혼 후 아이가 생기면서 자신의 꿈을 뒤로 미루고 아이가 자신의 인생이 되어버린 수진도 재훈과 마찬가지죠. 자아를 잃어버리게 되고 정체성들의 혼란도 오고 아이를 둔 엄마들의 삶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진아는 취업도 그렇고 미래에 대해 고민이 많은 청년들을 대변하고 있고.
결과적으로 본다면 이 세상 모든 가장뿐만 아니라 엄마와 청년들과 결국엔 모든 사람들이 상처가 없을 거란 생각을 하진 않아요. 그래서 ‘싱글라이더’는 어느 나이대의 어떤 성별이 봐도 자기얘기가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상처와 삶의 무게에 대한 이야기라 생각해요.
Q. 배우로서 살아오면서 중요한 걸 잊고 지나왔다했던 시기가 있나요?
시기라기보다 순간순간 생각하는 시점이 있어요. 작품을 하면서 매일 일을 하다보니까 어느 순간 내 몸에 익숙해진 걸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에 잊어버리려고 몸부림을 쳐요. 마치 처음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이런 리프레쉬는 계속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영화든 장르를 불문하고 그 안에는 웃음이 있고, 슬픔이 있고, 분노가 있는데 그 몇 가지 감정을 계속 해왔던 일이기에 자칫 잘못하면 습관적으로 하게 될까봐 그런 것을 주의하려고 하죠. 순간순간!
Q. 인간 이병헌으로도 그런 시기가 있을 것 같아요.
시간적인 문제 때문에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좀 부족하죠. (촬영 때문에) 길게 어디 가있는 경우들이 생기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동안은 웬만하면 (아이가) 깨있는 시간에 맞춰서 집에 잠깐이라도 들어갔다 나와요. 그렇게라도 시간을 함께 보내려고 노력해요. 긴 텀을 가지고 계속 같이 있으면 좋은데...그래도 쉬는 날이면 외출도 많이 하고 그래요. 나중에 만약에 긴 시간이 주어진다면 원 없이 함께 하고 싶어요.
Q. 최근 몇 년간 쉼 없이 작품을 많이 찍고 있으신 이유가 있나요?
이유는 따로 없어요. 그냥 우연히.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으면 안해요.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억지로 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Q. ‘놈놈놈’이나 ‘아이리스’를 기점으로 작품을 많이 하신 것 같아요.
어쩌면 그때가 기점이 될 수도 있겠네요. ‘놈놈놈’때 하느냐 마느냐하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지.아이.조’와 ‘나는 비와 함께 간다’ 이 세 작품을 같이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저러다 한 두 편 할까 말까한다고 했었죠. 그러다 그냥 ‘에라 모르겠다, 다 해보자’하고 세 작품을 다하게 됐어요. 그때 1년간 일정이 정말 힘들었죠. 제가 우유부단해서 결정을 팍팍 못하는 것 같아요. 아마 그때 이후로 꽂히는 작품들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Q. 시사회 때 웃기는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구체적인 욕심이 있으신가요?
구체적인 것은 없지만 ‘내부자들’이나 ‘광해’같은 영화가 100% 코미디 영화는 아니잖아요. 막 심각한 장면들만 찍다가 재미를 주는 장면들을 찍을 때 관객들의 반응이 처음으로 가장 확실하게 나오는 것 같아요. 웃음이 라는 게. 그럴 때 ‘웃음을 많이 줄 수 있는 영화를 찍으면 되게 기분이 좋아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또 재밌는 신들을 보고 관객들이 웃을 때 배우들이 느끼는 행복감도 크고요.
배우라면 누구나 흥행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병헌 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조금 뒤처지더라도 다양한 이야기, 소수는 인생영화라 꼽을 수 있는 이야기를 더 우선으로 생각한다는 이병헌. 그런 그가 선택한 ‘싱글라이더’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건지 궁금하지 않은가?
한편 이병헌의 밀도 깊은 감정연기로 화제를 몰고 있는 영화 ‘싱글라이더’는 전국 극장에서 절찬 상영중이다.(사진제공: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bnt뉴스 기사제보 star@bntnews.co.kr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