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재 기자] “아직까지 원 톱 영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
김윤진은 강한 티켓 파워의 여배우다. 배우와 여배우를 가르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 표현이지만, 여성 주연의 영화가 충무로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김윤진의 활약은 굳이 논란의 단어를 사용하게끔 만든다. 특히, 한국형 스릴러의 변곡점으로서 지금도 회자 중인 영화 ‘세븐 데이즈’는 그에게 ‘스릴러 퀸’이라는 명성을 안겨줬던 바 있다.
“실제로 퀸이 됐으면 좋겠다. (웃음) 사실 스릴러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 스크린 타임, 스릴러 적 요소, 줄거리, 시작, 중간, 마무리, 특히 반전까지! 깔끔한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좋은 도구들이다. 모르겠다. 구체적인 설명을 붙이지 않더라도 스릴러는 우선 재밌다. 지금껏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은 딱 한 가지다. ‘나라면 이 영화를 영화관에 가서 볼까?’ 그런 점에서 스릴러는 관객들이 스크린을 마주하는 아주 매력적인 장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영화관에서 본다는 것. 아주 당연한 상식이고, 지금도 통용되는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를 접할 수 있는 경로가 다변화되며, 영화관이 타 매체에 비해 가지는 우위는 즉시성과 동시성이 전부인 상황. 김윤진이 말한 영화관의 뜻은 나중에 헐값에 제공되는 것이 아닌, 관객들이 제값을 지불할 만큼 매력적인 영화에 참여하고 싶다는 바람이었으리라.
그리고 여기 만인을 극장으로 부르고픈 김윤진이 선택한 약 2년 만의 신작이 스크린에 개봉했다. 영화 ‘시간위의 집(감독 임대웅)’이다. 집안에서 남편의 죽음과 아들의 실종을 겪었던 가정주부의 25년 후를 다루는 이번 영화에서 김윤진은 부자(父子) 살해의 누명을 쓴 주부 미희 역을 맡았다. 더불어 그는 옥택연, 조재윤과 연기 앙상블을 이뤘다.
“이번 영화가 워낙 미희 중심의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조재윤 씨가 맡았던 철중 역할이든, 옥택연 씨가 공연했던 최신부 역이든 전형적이고 단편적인 캐릭터로 굳어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분들이 캐스팅된 덕에 캐릭터든, 이야기든 모두가 풍부해졌고, 언론시사회 때 두 사람에게 건넸던 고맙다는 이야기가 내게는 진심이었다.”
“100분이라는 러닝 타임 동안 미희의 시선을 쫓아가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캐릭터에 어떤 입체성을 부여하는 큰 각색은 따로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조재윤 씨나, 옥택연 씨나 나는 대본에서 느끼지 못했던 어떤 부분을 발견해서 연기에 녹여냈고, 그런 부분들이 몹시도 고마웠다. 두 분 덕에 미희의 감정이 잘 전달될 수 있었다.”
영화의 특성인 허구를 감안하더라도 극중 미희는 범인(凡人)이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의 폭을 지닌다. 상상이나 가능한가. 눈 앞에서 남편이 죽고, 아들까지 잃은 엄마의 마음을. 여기서 기자를 포함한 모두의 주안점은 바로 엄마로, 김윤진의 필모그래피 중 상당수는 모성애를 다루는 작품들이다. 영화 ‘하모니’ ‘심장이 뛴다’ 등이 이에 해당한다.
“관객들에게는 매 작품마다 같은 엄마일 수도 있지만, 분명한 점은 모두 다른 직업의 다른 성격을 가진 엄마들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 영화는 인물의 25년 전과 후를 모두 연기해야 했다. 그것도 누명을 쓴 채 억울한 수감 생활을 거친. 얼마나 괴롭고 지옥 같았을까. 때문에 많은 고민을 거쳤고, 목소리를 바꾸기 위한 후두암 설정이 들어갔다.”
홍보 전면에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25년 간의 수감 생활 후 미희가 목에 쥔 후두암이라는 병은 극에 기괴함과 을씨년스러움을 부여하며 영화의 공포성을 한층 배가시키는 요소다. 이에 관해 김윤진은 “25년 후의 미희 목소리는 연기하기에 굉장히 까다로웠다”며 운을 뗐고, 더불어 촬영 내내 그를 힘들게 했던 것으로 특수 분장을 꼽아 이목을 집중시켰다.
“성대를 누르는 것이 남자 배우들만큼 쉬운 것이 아니더라. 분명 술이나 담배를 안 하는 내가 쉽게 낼 수 있는 소리는 아니었고, 남자와 달리 어색하고 뭔가 자연스러움이 덜했다. 까탈스럽다는 표현을 쓰게 되는 것이, 잠깐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다른 소리가 나와서 고생했다. 연기하면서 내 원래 목소리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그때마다 깜짝 놀랐다.”
“이번 특수 분장은 영화 ‘국제시장’처럼 만들어진 실리콘을 부착하는 것이 아니었다. 피부 위에 특수 풀을 칠한 채 헤어 드라이어로 말려서 주름을 만들었고, 이 과정을 세 번 이상 반복했다. 수분이 전부 날아가니까 자극도 심했고, 얼굴이 빨개지더라. 더군다나 젊은 미희도 함께 연기해야 됐기 때문에 수분 크림을 바르는 등 노력을 많이 했다.”
김윤진은 ‘배역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에 최적화된 배우다. 그는 작품의 이상적인 완성을 위해 성대와 피부를 혹사해가며 미희의 노년을 묵묵히 연기했고, 아마 스크린 앞 관객들은 22년 차 배우의 열연에 놀라움을 표시할 것이다. 하지만 배우도 사람이다. 배역의 처절함을 연기하기 이전에 여자로서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심은 없었는지 궁금증이 샘솟았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길거리 캐스팅 출신도 아니고, 미스코리아 출신도 아니고, 외모가 돋보이는 배우는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요새 꽃미남 배우들이 예전보다 덜해진 것을 느낀다. 배우의 외모는 10분만 유지될 뿐, 나머지는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배우가 제일 좋은 배우 아니겠는가. 그건 여배우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물론 ‘내가 더 예뻤으면 인기가 많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은 해봤다. (웃음)”
미스코리아 출신이 아니라며 손사레 쳤던 김윤진의 데뷔작은 MBC ‘화려한 휴가’지만, 대중이 기억하는 김윤진의 첫 작품은 영화 ’쉬리’다. ‘세븐 데이즈’가 한국형 스릴러의 변곡점이었다면 ‘쉬리’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발점으로, 그는 이명현 역을 맡아 일약 스타 덤에 올랐다. 한석규와 공연했던 수족관 앞 키스 신은 지금도 기억되는 명장면.
이 가운데 2017년은 한국 영화 팬들에게 특별한 한 해로 기억될 듯 싶다. ‘쉬리’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저마다의 주연작을 들고 극장가를 연달아 찾는 진풍경이 벌이지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한석규는 3월에 영화 ‘프리즌’을 들고 박스오피스 1위를 도맡는 중이며, 김윤진의 ‘시간위의 집’은 4월5일, 최민식의 ‘특별시민’은 4월26일 개봉 예정이다.
앞서 소개했듯 ‘쉬리’는 한국 영화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주역인 작품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영화계를 ‘쉬리 Era(에라)’로 정의하는 데 무리가 없는 상황. 하지만 시대를 개막했던 주인공들이 약 20년의 세월에도 불구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지금의 풍경은 우연보다는 마법으로 기자에게 다가온다. 더불어 김윤진은 이것을 “축복”이라고 표현했다.
“그분들은 그때부터 20년을 유지하셨고, 나는 그때가 첫 영화였기에 비교 대상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원 톱 영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다. 당시만 해도 30대 여배우는 한국 영화에 캐스팅이 안 됐다.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오히려 20대 여배우 중에 티켓 파워 있는 이를 찾기가 힘들다. 시대가 변했다.”
“장르적으로 ‘프리즌’과 ‘시간위의 집’은 너무도 다르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분위기가 우리 쪽으로 넘어올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웃음) 한석규 선배님이 저에게 바톤 터치를 해주시면 좋겠다. 더불어 최민식 선배님의 영화가 4월 말에 개봉하는데, 이 훈훈함이 당연히 최민식 선배님에게 넘어가는 것으로 마무리되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
마지막으로 김윤진은 악역을 해보고 싶다는 소망을 밝혀 취재진의 관심을 불러 모았다. 덧붙여 김혜수 주연의 ‘차이나타운’을 언급하며 여성 캐릭터가 가지는 전형성의 파괴를 기원했다. 파괴와 탄생은 동전의 양면이다. 기존의 것이 파괴되는 순간 대중은 구태의 파기 속에 새로움을 향유할 것이다. 아마 김윤진은 그 순간의 선봉에 서있는 여배우일 테다.
“돌이켜보면 악역과는 거리가 먼 연기 인생이었다. 그간 신뢰감을 주는 정의로운 캐릭터를 많이 해왔기에, 내가 악역을 맡으면 기존에 보지 못했던 신선함이 추가되지 않을까 싶다. 항상 옳은 캐릭터만 연기하던 배우가 바른 척하고 못된 짓을 일삼으면 얼마나 밉게 보이겠는가. 영화 ‘나를 찾아서’의 악역이 같은 맥락인데, 마침 또 스릴러 장르다.”
“김혜수 씨의 영화 ‘차이나타운’을 보자. 악역이지만 전형적이지 않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 영화를 보고 굉장히 반가웠던 이유가 ‘분명히 장르 안에서 전형화되지 않는 여성 캐릭터가 나올 법도 한데’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남성 중심의 영화 못지않게 세게 와 닿아서, 앞으로 이런 캐릭터들이 많아지겠다고 상상했지만 아쉽게도 이어지진 않더라.”
관계자의 종료 안내와 함께 인터뷰가 끝나려던 찰나, 기자는 언론시사회 때의 어떤 상황을 언급했다. 당시를 요약하자면 행사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2% 부족한 답변으로 마감된 물음을, 질문 외의 존재인 김윤진이 굳이 마이크를 들어 대답을 완성시켰던 것. 취재진 사이에서도 미담으로 칭송될 정도로 그의 배려심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이에 그의 행동이 프로 의식의 발로인지 아니면 남을 배려하는 사려 깊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질문을 건넸고, 김윤진은 “일단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한 질문이었는데, 그 부분이 웃음 속에 넘어가는 것 같아 아쉬움이 있었다. 영화적인 것을 덜 설명하기에는 아까운 시간 아닌가. 대부분 안 그러는데 그래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덧붙였다”고 운을 뗐다.
이어 그는 “나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의 열정이 투영된 작품이 ‘시간위의 집’이다. ’잘됐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이 간절하다”며, “언론시사회를 비롯한 행사들에서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들을 받아볼 때마다 분명 배우는 부분도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고 겸손을 내비쳤다.
흔히 김윤진을 수식하는 단어로 ‘월드 스타’라는 단어가 사용되곤 한다. 아마 전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바 있는 미국 ABC ‘로스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기자는 그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고 싶다. ‘시간위의 집’에서 만났던 김윤진은 거만할 법도 하지만, 일절 그런 내색 없이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오로지 연기만을 이야기했다.
겸손함, 감사함 등이 ‘월드 스타’의 준비물은 아닐 것이다. 대중은 스타들의 내(內)를 보지 않는다. 그들의 가진 재능에 매료될 뿐이다. 하지만 김윤진이 가지고 있는 가치들은 ‘월드 스타’라는 표현에 수긍하는 배경으로 충분했다. 과연 이런 배경이 ‘시간위의 집’에도 통할까. 만약 통한다면 그것은 김윤진의 내면이 연기에도 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시간위의 집’은 전국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사진제공: 페퍼민트앤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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