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젬마 기자] 이립(而立)은 나이 ‘서른’을 달리 이르는 표현으로 자신의 인생의 뜻을 분명히 세우는 것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 차승연은 누구보다 충실한 서른 살을 보냈다.
홍대에서 산업디자인학과를 전공한 그녀는 졸업 후 디자인 회사에서 약 4년간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던 중 어린 시절 품었던 연기자의 꿈을 뒤늦게나마 이루기 위해 나이 서른에 과감히 퇴사를 결정, 연기자로서 제 2의 인생에 출사표를 던졌다.
이후 영화 ‘코리아’를 시작으로 드라마 ‘전설의 마녀’, ‘복면검사’, ‘별에서 온 그대’ 등 꾸준히 작품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리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김과장’에서 ‘장위치’ 역할로 시청자들의 주목을 사로잡았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질문 하나하나를 음미하듯 시종일관 자신의 생각을 진솔하게 나누던 그녀에게서 연기를 대하는 진정성이 전해졌다. 어느덧 데뷔 9년차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현장에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던 그녀는 여전히 연기가 목마르는 천상 배우다.
Q. 화보 소감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너무 재미있었다. ‘여러 장 찍다 보면 그 중 몇 장은 잘 나오겠지’ 라는 생각보다는 모든 한 컷 한 컷이 완벽하게 나올 수 있게끔 심혈을 기울였다. 아직 체력이 한참 남아서 더 해도 될 것 같은데 벌써 끝나버렸다(웃음).
Q. 데뷔 전 홍대 미대 졸업 후 평범한 직장생활을 했다고
어렸을 때 패션 모델 쪽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굉장히 보수적인 부모님 아래 자란 탓에 그때는 적극적으로 내 꿈을 어필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게 뭘까 고민하다 그림에 소질이 있던 걸 살려 미대 진학을 준비했고 홍대 산업디자인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4년 가까이 회사 생활을 했는데 왠지 재미가 없더라. 언젠가부터 잊고 있던 어렸을 적 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 동안 억압돼 있던 게 툭툭 치고 올라오던 거지. 뭔지 모르게 이 길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고 홀린 듯 퇴사를 했다. 그리고 나서 다짜고짜 연기학원을 등록했다. 연기를 배운 적도, 주변에 관련 일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 어디 물을 데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었지. 속된 말로 맨 땅에 헤딩하듯 시작해 산전수전 겪으며 여기까지 온 거다.
Q. 그때 나이가?
스물 아홉에 퇴사를 하고 서른 살에 연기를 시작했다.
Q. 부모님과 가족들에게는 뭐라고 이야기했나
처음에는 전혀 알리지 않았다. 나 조차도 미래가 너무 불확실하니까. 부모님께 말씀 드리면 곧바로 ‘너 어떻게 하려고?’ 라는 소리가 나올 텐데 부모님을 안심시켜드릴 만한 말을 드릴 수가 없었다. 좀 정리가 돼서 주변이 안정적으로 갖춰지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더라. 처음에는 매일같이 7시 반에 일어나서 출근하던 사람이 갑자기 출근을 안 하니까 너무 이상했다. 마음이 되게 불안하고 출근 시간에 맞춰 저절로 눈이 떠지고. 경제적인 부분도 걱정으로 다가오고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앞날이 불안했던 시절이었다.
Q. 데뷔작
영화 <코리아>. 정말 스치듯 아주 잠깐 나왔다(웃음).
Q. 그토록 꿈꾸던 배우가 되어 스크린에 나오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 기분이 어땠나
너무 부족하기도 했지만 일단은 벅찬 감정이 가장 컸다. 그토록 바라던 일이었으니까. 말로 못다할 만큼 행복했다.
Q. 학창시절엔 어떤 학생?
조용한 학생이었다. 친구도 별로 없고. 다만 당시에 나중에 커서 어떤 모습일까 그런 고민을 상당히 많이 하고 살았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무슨 생각에 그렇게 잠겨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 나이 때쯤에는 어른들이 으레 ‘커서 뭐가 될래?’ 라는 질문을 많이 하지 않나. 옆에서 친구들이 ‘경찰이요’, ‘간호사요’ 할 때 나는 혼자 속으로 불안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왜 나는 모르겠지?’, ‘나는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되지?’ 했었다.
그런데 사실 이 고민에 대한 답을 명확히 내릴 수 있었던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 서른 살에 그토록 바라던 연기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 이후로 5년 정도는 정말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었으니까. 뚜렷이 잡히는 것도 없고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도 없으니 연기를 하면서도 여전히 불안했다. 주변 가족들이나 친구들의 우려도 한몫 했고. 나이 서른 넘어 배우가 되겠다고 하니 ‘무슨 소리냐’, ‘그냥 이직 준비나 해라’ 등 다들 걱정을 많이 했다. 그들은 아마 내가 몇 달 못 버티고 그만둘 거라 생각했을 거다. 그런데 한해 한해 지나면서 조금씩 작품에 나오는 모습을 보며 차츰 믿어주기 시작하더라.
Q. 30년을 평범하게 살아오다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 터
요새는 어렸을 때부터 아역으로 차츰차츰 경력을 쌓아온 친구들이 많지 않나. 그런 친구들에 비해 나에게는 모든 현장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온 나에게는 카메라 앞에 서는 거나 사람들 앞에 나서서 연기를 하는 게 부자연스럽기만 했다. 긴장으로 온 몸이 굳고 경직되는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나름대로 혼자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집에 캠코더를 설치해 앞에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연기를 하거나 노래를 하거나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 녹화해 계속해서 수천 번 수만 번 카메라로 찍어 돌려봤다. 한번은 대사 하나를 가지고 연습하는데 5~6시간이 흘렀더라. 밥도 안 먹고 어떻게 5시간이 흘렀는지 스스로 놀랄 정도로 그렇게 무수히 반복해가며 연습했다. 그 작은 캠코더 하나에 연기 연습이나 오디션 영상까지 나의 모든 과정을 다 담았다. 그때부터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Q. 선망하던 배우가 된 이후 그 전의 삶과 비교했을 때 얻은 것과 잃은 것
얻은 건 ‘행복’. 하고 싶던 일을 즐기면서 하는 지금이 참 행복하다. 잃은 건 없는 거 같다. 정말 아주 짧은 한 장면 나오기까지도 너무 많은 시행착오들을 겪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경험 조차도 너무 값진 순간들이더라. 물론 너무 힘들 때도 있었고 우울할 때도 있었지만 내가 새로운 길을 선택한 만큼 그에 따르는 노고는 당연히 겪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잃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힘들었던 경험들은 나를 성장시켰고 그 모든 게 밑거름이 되어 지금의 내가 여기 이렇게 서있을 수 있는 자산이 됐다.
Q. 초보 배우시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한 드라마 오디션에 갔을 때 일인데 열심히 연기를 하는 도중에 다음 대사가 기억이 안 나는 거다. 그런데 하필 그 대사를 까먹은 시점이 막 욕을 하면서 싸우는 장면이었다. 그래서 결국 계속 욕만 내뱉다 나온 적이 있다(웃음).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걸쭉한 욕만 늘어놓다가 “알겠어? 너 그렇게 살지마!” 하고는 “다 했습니다” 하고 퇴장해버렸다(웃음).
Q.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뻔하지 않나(웃음).
또 한번은 일일드라마를 찍을 때의 일인데 세트 촬영을 하던 중이었는데 그때 시간이 새벽 4시쯤이었다. 그 시간쯤 되면 잠도 쏟아지고 기억력은 점점 더 흐릿해진다. 그날 NG를 17번을 냈다. 그렇게 긴 대사도 아니었고 심지어 나만 그 대사를 끝내면 모두들 퇴근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민망한 상황 속에서 연거푸 NG를 내면서 너무 민망했던 기억이 난다.
Q. 작품을 하면서 만나봤던 배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사람은?
출연했던 드라마 중 <엄마의 정원>에 주연으로 나오셨던 고두심 선배님. 나와 대면하는 장면이 없어서 직접적으로 마주칠 일은 없었고 선배님 촬영하실 때 구경을 갔는데 정말 감탄이 그 자체더라. 아마 그때 시간 날 때마다 가서 봤던 거 같다. 그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 큰 배움이 되거든. 작품이 끝나기 전에 선배님과 대사 한번만 같이 할 기회가 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는데 결국은 못 만났다. 나중에 종방연 때 인사 드리고 기념 사진 한 장 찍었는데 아마 선배님은 기억 못하시겠지(웃음).
Q.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봤을 때 어떤 연기자인 것 같나
정말 열심히 하는 연기자. 나는 어떤 작품이 됐건 매번 정말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하는 편이다. 그리고 현장에 갔을 때 주변 모든 선후배, 스탭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한다.
Q. 롤모델은?
롤모델까지는 모르겠는데 눈 여겨 보는 배우는 틸다 스윈튼. 매 작품마다 누군지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변신에 능하지 않나. 정말 매력적인 배우인 거 같다.
Q. 촬영 때 적극적인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평소 사진 찍는 걸 좋아하나?
평상시에 핸드폰 카메라로 찍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렇게 콘셉트 잡고 예쁜 옷, 멋진 화장을 하고 찍는 건 좋아한다. 이럴 때 내 안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솟아나는 걸 느낀다.
Q. 대화를 나누다 보니 촬영 때 모습과 또 다르다. 사진을 찍을 땐 도도하고 시크한 모습이 주를 이루었던 데 반해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니 허당기 있는 모습들도 비치는데 실제 성격은?
실제로 보이는 것처럼 시크하고 도도한 모습들도 물론 맞다. 무척 차가울 때도 있고. 그런데 사실 난 좀 재미있고 웃긴 편이다. 보이는 것보다 재미있는 구석이 많은 사람이다(웃음).
Q. 드라마 ‘김과장’ 출연 직후 진행했던 인터뷰가 실검에 오를 정도로 화제가 되었는데, 그 이후에 찾아온 변화가 있다면?
일단 섭외 전화가 많이 온다. 연기를 시작한 이후 8년 동안 꾸준히 활동을 해왔는데 ‘김과장’으로 데뷔한 줄로 아는 사람들도 있더라(웃음). 또 어떤 사람들은 연변에서 온 배우냐고 오해를 하기도 하고(웃음). 기나긴 무명시절을 겪다가 이렇게 주목 받는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하고 난 뒤에 갑자기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기는 걸 보면서 한동안은 얼떨떨했다. 한번은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데 갑자기 가게의 배경음악이 ‘김과장’ ost로 바뀌더라.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기분은 좋더라. 그런 경험들이 초반엔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너무 감사하고 좋다. 그런 작은 관심들이 나에게는 에너지의 동력이 돼서 다음 작품에서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야겠다는 열의가 솟기도 하고. 나는 내 기사에 달린 댓글들도 하나 하나 다 열심히 본다. 대중들이 보여주는 관심만큼 더 다양하고 매력적인 모습들을 보여드리고 싶다.
Q. 앞으로 맡아보고 싶은 역할은?
웃긴 거, 섹시한 거, 막 관능적인 거? 되게 사나운 역할도 해보고 싶다. 막 총 쏘고 도둑 때려잡는 경찰 역이나 빌딩에서 떨어지는 액션도 좋고. 지금까지는 어쩌다 보니 줄곧 오피스 우먼이나 좀 센 직장 상사 역할들을 많이 맡았다. 바라건대 앞으로는 조금 더 다양한 캐릭터들을 보여드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귀신 역할 같은 것도 잘 할 수 있을 거 같은데(웃음).
최근 개봉한 영화 중 ‘공각기공대’에 나오는 스칼렛 요한슨 같은 역도 정말 매력적이더라. 우리나라 여자 배우들도 캐릭터가 좀 더 다양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기회만 된다면 정말 외계인이나 로봇 등 사람 같지 않은 역할도 도전해보고 싶다. 동물로 변하는 인간이라든지(웃음). 몸에 딱 붙는 검정 가죽 의상 입고 발차기를 한다거나 오토바이 타고 질주하는 등 동적인 역할도 재미있을 것 같고. 생각만 해도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웃음).
Q. 사람들이 배우 차승연을 떠올렸을 때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나
계속 보고 싶은 배우. 궁금한 배우. 또 아직은 매번 비슷한 캐릭터의 배역을 맡아왔지만 앞으로는 좀 더 배우로서 영역을 확장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지금까지 없었던 캐릭터도 능히 해낼 수 있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 현재는 캐릭터의 확장이 배우로서의 목표다.
기획 진행: 허젬마
포토: 리다매박
의상: 레미떼
팔찌: 티아도라(TEDORA)
파우치: 토툼(TOTUM)
선글라스: 휠라 by 모다루네쯔
헤어: 이경민포레 의환 부원장
메이크업: 이경민포레 신애 디자이너
bnt뉴스 기사제보 fashion@bn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