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재 기자 / 사진 조희선 기자] “연기...몸이 부서져도 아낌없이 하고 싶다”
사극은 드라마가 지니고 있는 가장 극적인 거울이다. 미디어를 향유하는 소비층과 맞닿는 것이 없기에, 제작진의 상상력이 더욱 적극적으로 발휘된다. 더불어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에 두었습니다’라는 문구 없이도 보는 이들을 만족시키는 과거의 실재란 가치까지.
선과 선이 맞닿아 생기는 꼭지점처럼 상상력과 실화가 만나는 순간 그 앙상블의 매력은 시쳇말로 ‘어마무시하게’ 팽창한다. 있을 법한 이야기 아닌 존재했던 이야기가 브라운관에서 펼쳐지는 상황. 게다가 현실과의 유사성마저 전개된다면 그야말로 흥행 예약이다.
바로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극본 황진영, 연출 김진만 진창규/이하 역적)’이 그러했다. 폭정 그리고 민중의 봉기. 안방극장에 기시감을 안겨준 본 작품은 마지막회에서 최고 시청률 14.4%(닐슨 코리아 기준)를 기록하며 5월16일 종영했다. 이 가운데 주역 장녹수를 연기한 배우 이하늬를 25일 오후 서울시 종로구 한 카페에서 bnt뉴스가 만났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고독을 이해하는 유일무이한 캐릭터. 또한, 이 캐릭터는 자신을 예인(藝人)이라고 불러줬던 홍길동을 잊지 못해 질투를 일삼고, 사랑과 세상 속에 방황하며,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역적’의 관전 포인트가 연산군의 여자로 기억되는 장녹수를 더불어 홍길동의 여자로 만든 것이라면, 이하늬는 그것을 충실히 이행해냈다.
먼저 칭찬을 언급했다. 그는 지난 2007년 ‘미스 유니버스’ 4위에 올랐던 바 있는 서구적 외모의 소유자이기에 사극 안에서의 이질감이 우려됐던 것이 사실. 하지만 가야금, 장구 등의 특기를 바탕으로 예인 장녹수를 멋들어지게 소화해냈다.
“정말 감사하다. 감사한데, 호평을 해주실 때는 의연하게 지나가야 되는 것 같고, 혹평을 해주실 때도 의연하게 지나쳐야 되는 것 같다. 나는 호평도 받아봤고, 혹평도 가져봤다. 배우는 언제나 둘 사이를 계속 오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도 내려놨다. 연기도 우리가 삶을 사는 것과 똑같다. 어떤 때는 잘해낼 수도 있고, 어떨 때는 못할 수도 있다.”
“내 안의 순수한 열정과 내가 정확하게 배우로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같은 본질적인 것에 다가가기 위해 계속 노력 중이다. 그래서 연기를 잘하고 못하는 것보다 본질을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본질을 흩트리는 것에는 귀 기울지 않겠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했다. 칭찬에는 감사한 마음뿐이지만, 의연하고 꿋꿋하게 가려고 노력했다.”
‘연산군일기’에 기록된 장녹수는 가난해서 시집도 여러 번 가고, 자식까지 둔 여인이다. 게다가 과소비를 뜻하는 표현인 ‘흥청망청’의 흥청(興淸)이라는 기생 출신에서 후궁의 지위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기도 하다. ‘역적’에서도 마찬가지다. 장녹수와 연산군 사이에 홍길동이라는 인물이 첨가되었을 뿐, 이번 작품에서도 장녹수는 임금을 품에 안는다. 이하늬는 ‘역적’의 장녹수를 어떻게 추억할까.
“녹수는 진취적이다. 또한, 표면적으로 보면 삶에 대한 의지와 열정 그리고 욕심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람에 대한 사랑도 큰 인물이다. 내가 알고 이해한 녹수는 그렇다. 녹수는 마지막까지 연산 곁을 지킨다. 임금의 여자이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아마 그 안에는 동지애도 있을 것이고, 모성애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려웠다. 어떻게 보면 뭉뚱그려진, 복합적인 감정의 라인들이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깊이가 필요했다. 많은 빛깔들도 필요했고, 스펙트럼들이 필요했다. 많은 고민을 안겨줬던 캐릭터다.”
장녹수는 약 500년 전 연산군이 사랑을 독차지한 신데렐라였지만, 현재는 미디어가 사랑하는 조선 시대의 여인이다. TBC ‘사모곡’, JTBC ‘인수대비’, 영화 ‘왕의 남자’ ‘간신’ 등 배우 윤정희부터 시작해서 차지연까지 일곱 명 이상의 배우들이 저마다의 장녹수를 완성해냈다. 특히, KBS2 ‘장녹수’의 주제가 ‘장녹수’는 노래방의 여전한 인기 애창곡이다.
이미 수차례 연구됐던 캐릭터를 다시금 재현하는 것에 부담감이 컸을 터. 하지만 그는 부담감 대신 캐릭터에 집중했다고 말했다.
“사실 아주 깊은 슬픔의 감정부터 시작해서 그런 울과 화를 가지고 쟁취를 하면서 사랑간 여자의 이야기를 담아야 했기 때문에, 사실 선배들이 어떻게 이야기를 하셨는지 보다 내 앞에 녹수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가 더 화두였던 것 같다. 또한, 그가 예인이었기 때문에 예인 장녹수의 표현법을 궁리했다. 어떻게 하면 이 신 안에서 음악과 춤이 어우러져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지 고민했고, 이런 걱정들이 정말 많았다.”
그런 이하늬의 노력들은 대중뿐 아니라 대배우의 마음마저 움직였다. 최근 배우 유동근은 한 인터뷰에서 이하늬를 칭찬했다. 내용은 이하늬의 장녹수는 그저 왕이나 홀리는 여자가 아니었다는 것. 더불어 38년 차 배우는 한복 자태와 음색이 뛰어난 이하늬는 정통 사극에서 제대로 된 한 방을 보여줄 것이라고 예상했다.
“유동근 선배님은 내가 정말 존경하는 배우다. 그 말을 전해 들었는데, 정말 황송했고 진짜 눈물이 나더라. 드라마 현장이 속세와 떨어진 외딴 곳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선배님의 말씀을 알게 됐는데, 어떤 것보다 큰 위로가 됐고 ‘괜찮아’라는 응원의 메시지처럼 들렸다. 선배님을 나중에 뵙게 된다면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연기를 하지도 못했는데, 그런 말씀을 해주셔서 정말 황송할 뿐이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는 ‘역적’을 통해서 ‘비터 스위트(Bitter Sweet)’라는 표현을 이해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비터 스위트’는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카라멜 마끼아또를 좋아하던 내가 아메리카노를 좋아하게 되고, 밀크 초콜릿을 사랑했던 내가 다크 초콜렛을 사랑하게 됐다. 감정도 똑같은 것 같다. 슬프면서도 기쁘고, 기쁘면서도 슬픈 감정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도 완벽히 이해했다고 말하기 힘들지만, 어쨌든 ‘역적’을 통해서 그런 부분을 많이 배웠다.”
이하늬는 건강미가 돋보이는 배우다. 하지만 그를 선호하는 팬들의 여론을 관찰하자면 남성보다 여성의 비율이 더 큰 것을 확인 가능하다. 건강미는 곧 ‘섹시(Sexy)’와 치환되고, 그것을 선호하는 남성들이 많았던 것을 돌이켜보면 이는 평균과 상반되는 특이한 경우다.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이것은 그가 지니고 있는 개인의, 경력의 완벽함 때문이리라. 과장을 보태자면 그는 연예계의 ‘엄친딸’이다. 아름다운 외모, 정점의 학력, 게다가 국악에 관한 재주까지. 재(才)와 색(色)을 겸비한 이하늬의 완벽함은 여성들이 그를 동경하게끔 자극한다.
실례로 인터뷰 장소로 이동하는 중간 버스 광고에 부탁된 한 음료 광고 속 이하늬는 ‘건강한 여자가 아름답다’라는 문구와 함께 활짝 웃고 있었다. 어느 곳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이하늬가 마시는 음료. 아마 이것은 보는 이의 기저에 잠들어 있다가 음료 코너 앞의 소비자 심리를 자극할 것이다.
이에 그는 “완벽이란 양면이 항상 공존하는 것 같다. 완벽하게 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할 수 없다”라며, “완벽한 것이 좋은 것인지에 대한 질문도 하게 된다. 완벽한 사람을 보면 어떤 부분에서는 정이 안 간다. ‘너 잘났어. 근데 너 진짜 정 안 간다’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크게 나무랄 것은 없지만 매력이 없는 사람이 있다”라고 입을 열었다.
“어느 순간부터 투박하고 완벽하지 않은 것에서 오는 매력이 크게 느껴지더라. 80%의 치열함과, 내려놓음이 같이 공존해야 될 것 같다. 그리고 절대로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치열하게 완벽을 기하지만, 아닐 때도 쿨하게 ‘그럴 수 있어. 나 이 작품에서 괜찮아. 이 정도면 만족해’라고 생각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야 살겠더라. 안 그러면 살 수가 없는 것 같다. 행복하게 살 수가 없는 것 같다.”
배우는 연기를 하는 직업이다. 연기는 눈에 보이는 것이며, 이에 수반되는 배우의 외양은 연기 못지않게 선호도에서 큰 부피를 차지한다. 연기는 성숙되지만 주름은 늘어나는 시간의 흐름에서 배우, 특히 여배우는 대중의 외면을 경험하곤 한다. 유독 나이에 민감한 대한민국 미디어에 터를 잡은 배우 이하늬에게 “역할이 좁아지는 것을 체감 중인지 궁금하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하자, 그는 “원래 좁았기 때문에”라는 답을 내놓았다. 순도 높은 털털함이 질문의 긴장감을 해소시켰다.
“정말 요즘은 여배우의 작품들이 많이 없다. 그런데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꿋꿋이 버티는 시간이 중요한 것 같다. 그 시간이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는데, 배우는 촬영장과 마찬가지로 기다리는 것이 직업 아닌가. 온전히 내 모든 것을 꺼내도 아깝지 않을 다음 작품을 만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직업 중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공백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어떻게 잘 비우고 잘 채울 것인지가 중요하다. ‘역적’이 끝나고 백수로 돌아가기 때문에 앞으로는 이것이 이하늬의 화두다 (웃음).”
약 서른 개의 질문이 오갔던 인터뷰의 피날레로서 연기의 정의를 부탁했다. 사실 배우에게 연기를 묻는 것은 그간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을 캐묻는 얄궂은 결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하늬는 한 시간에 가까운 인터뷰이와 인터뷰어의 대화 속에서 스스로 연기의 본질을 중시했다. 인기라는 부수물 아닌 배우로서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강조했던 것. 누군가에게는 소모적으로 그칠 수도 있는 질문. 그는 “사실 악기를 하면서 항상 갈증이 있었다”라는 말로 대답을 시작했다.
“과거에는 ‘나는 왜 만족하지 못할까?’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하지만 연기를 만나고 난 이후에는 ‘우와’라는 탄성이 나오더라. 연기는 내 감정과 감성을 다 폭발시켜도 괜찮은 대상이었다. 온전히 내 몸 자체가 악기가 되어서 아주 진실 되게 이야기하는. 한번은 집에 가서 화장을 지우는데 오열 신 때문인지 눈에 실핏줄이 다 터져있었다. 그만한 감정을 쏟아낼 수 있는 영역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재미있는 일이다. 몸이 부서져도 아낌없이 하고 싶다.”
아마 이하늬가 장녹수 역할에 캐스팅된 배경에는 국악 전공이라는 배경이 크게 작용했을 터다. 김진만 PD는 요부 장녹수 대신 예인 장녹수를 ‘역적’에 녹여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하늬와 장녹수의 만남은 국악 외에도 예인이라는 접점이 강하게 작용한 듯 보였다. 내면의 모두를 폭발시키는 것에 소환되는 기쁨의 탄성이라니.
여러 가지 기예를 닦아 남에게 보이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예인의 정의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감정의 폭발을 즐기고 있는 이하늬의 다음은 또 어떤 예(藝)가 그려질지 궁금증이 고조된다.(사진출처: bnt뉴스 DB, MBC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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