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역적’ 채수빈, 모호함을 물리치는 실마리의 뿌듯함

입력 2017-06-01 11:37  


[김영재 기자 / 사진 백수연 기자] “다양한 삶의 경험에 감사하다”

능선과 내리 쬐는 태양을 뒤로 하고 한 여인이 나무 장대 위에 묶여 있다. 그의 눈은 세상과의 조우가 금지된 듯 검은 헝겊으로 가려져 있고, 몸은 새빨간 포승줄로 묶여 있으며, 겉치마는 바람에 휘날린다. 비극적 결말을 암시하는 까마귀 울음소리가 공간에 메아리친다. 태양의 강렬함을 증명하는 보랏빛 번짐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홍길동(윤균상)의 한 마디에서 드러나는 그의 이름은 가령(채수빈). 가령은 “나 때문에 돌아서면 다신 보지 않을 겁니다. 다신 보지 않습니다. 다시는 보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에 홍길동의 화살이 가령의 가슴에 날아와 꽂히고, 한지를 물들이는 검은 먹처럼 선홍빛 피가 저고리를 물들인다. 뜻 모를 미소가 가령의 입을 스쳐 지나간다.

문장의 도치처럼 영화나 드라마에서 시간의 재구성은 연출진이 써내려가는 하나의 영상 문법이다. 이를 통해 추구하는 바는 ‘강조’. 기자가 강조라는 단어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작은따옴표들처럼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극본 황진영, 연출 김진만 진창규/이하 역적)’ 측은 한 여인이 스스로를 희생하는 신을 첫 방송과 28회 모두에 등장시켰다.

이것은 무엇을 위한 강조였을까. 낭군에 대한 여인의 사랑? 아니면 대의를 위한 개인의 희생? 미디어란 창작자의 의지가 주입된 창조물이고 특히 ‘역적’은 그 주관이 또렷이 드러났던 작품이다. 하지만 이것이 시청자의 품에 안겼을 때 그 의지와 주관은 저마다의 다른 해석으로 탈바꿈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채수빈이 있었다. 그는 약 열 편여 가량의 주조연작들에 참여했던 경력이 돋보이는 연기를 펼치며 강조의 기능성을 강화시켰다.

‘역적’에서 뒤틀린 운명 속에 홍길동을 향한 사랑을 영속하는 가령을 연기했던 배우 채수빈을 18일 오전 서울시 강남구 한 카페에서 bnt뉴스가 만났다. 가령은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자리하며 자신이 할 수 있다 여겼던 것 이상(以上)을 하게 되고, 하고 싶어 했던 것 이상(理想)을 욕망하며, 여자 아닌 인간으로서의 삶을 만끽하는 캐릭터. 더불어 이 캐릭터는 허균이 ‘홍길동전’을 집필했던 것처럼 극중 ‘홍첨지뎐’을 엮으며 실제와 가상을 혼재시킨다.


먼저 30부작의 대장정을 마친 소감을 물었다. ‘역적’은 최고 시청률 14.4%(닐슨 코리아 기준)을 기록하며 5월16일 종영했다. “일단 종영 소감은 대단한 작품에, 좋은 역할로 참여할 수 있어서 뿌듯했고, 감사했다. 여운이 꽤 길 것 같은 작품이고, 한동안 아쉬움에 시달릴 듯하다. 가령이라는 인물 자체가 워낙 사랑스러운 존재다. 연기하면서 밉보이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편하게 하고 싶은 대로 연기할 수 있었다.”

극중 홍길동은 괴력의 아기 장수 출신이자, 성인이 되어서는 탐관오리와 임금을 벌하는 의적이다. 그를 찾는 백성의 목소리는 아주 당연한 일. 이 가운데 가령은 낭군이 나만의 남자 아닌 세상의 영웅으로 거듭나는 것을 응원하고, 또 목숨까지 내놓는다. 채수빈은 “단단하고, 심지가 흔들림이 없으며, 용기 있는 친구다”라고 가령을 소개했다.

이어 “가령은 자신보다 남을 더 사랑했지만 나는 그렇게 못한다. 부모님을 정말 많이 사랑하지만, 아직까지는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다”라며, “부모님께 여쭤봤다. 어머니도 자신 외에는 이상의 사랑을 못 겪어봤다고 말씀하시더라. 아버지는 달랐다. 어머니를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고 말씀하셨다. (웃음) 이 점에 관해서 생각을 많이 했는데, 현실적으로 계산하지 않는 가령이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라고 말을 보탰다.

더불어 그는 “감독님이 늘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가령이는 직진 가령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넌 직진 가령이다’라는 말이었다”라며 연기에 계획성을 내포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전 작품들을 했을 때는 인물이 어떻고, 어떤 삶을 살아왔고, 이 인물이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생각을 많이 했다. 고민도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현장에서 느끼는 대로 즉흥적으로 연기했다.”

가령은 캐릭터의 스펙트럼이 넓다. 초반에는 그저 홍길동에게 연정을 품은 여인이었지만, 후반에는 앞서 소개했듯 구국을 위해 목숨마저 기꺼이 내놓는다. 부담감은 없었을까.

“많이 있었다. 가령의 표현법에 관해서 조언을 구하려 했고, 아무튼 계산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을 했는데, 결국 ‘다 내려놓고 그냥 놀면 된다’라는 생각 속에 믿고 갔다. 상황이 이유 없이 바뀐 것이 아니고, 바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배경이 자연스럽게 쌓여갔고, 가령이의 기본 성격 위에 상황들이 바뀐 것이라서 자유롭게 연기했다. 얽매이지 않았다.”


홍길동 역은 윤균상이 맡았다. 두 사람의 조화가 좋았다는 덕담 속에 호흡을 물으니 그는 자신보다 윤균상을 앞세웠다. 배려가 돋보였다. “일단 오빠가 배려도 좋고 상대를 편하게 해줬다. 어떤 톤으로 연기를 해도 잘 받아줬다. 그래서 불편한 없이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었고, 그래서 화면에서 더 예쁘게 그려졌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 가령이 홍길동을 바라보는 애틋한 시선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궁금했다. “계산하지 않고, 현장에서 가령이와 길동이로 만나서 정말 그 마음을 느꼈다. 표정 같은 것을 의도하고 의식하지 않았다. 준비하지 않고, 내려놓고 현장에서 느껴보려고 했다. 대신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나눴다. 매주 전체 리딩도 도움이 됐다.”

채수빈은 이번 작품에서 연기 외의 또 하나의 장기를 대중에게 선보였다. 바로 노래다. 배우와 가수를 병행하는 것은 더는 새로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주연 배우의 OST 참여는 관심을 이목을 집중시킨다. ‘역적’의 열 번째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사랑이라고’를 만든 안예은은 그의 목소리와 감정, 음정 모두를 칭찬했던 바 있다.

“기계가 좋다는 생각뿐이다. (웃음) 녹음도 돈이 드는 것 아닌가. 공짜가 아니기 때문에 처음에는 괜히 민폐만 될 것 같았다. 사람들도 오셔야 하고. 그런데 또 다른 OST ‘익화리의 봄’을 부르셨던 김상중 선배님께서 배우로서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니 꼭 한번 해보라고 추천하셨다. 부끄러웠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가수 채수빈의 시작은 ‘어이 얼어자리’에서 비롯됐다. “가령이 궁에 들어갈 때 연산 눈에 띄게 되는 특기가 하나쯤은 있어야 됐다. 그래서 작가님이 악기, 춤, 노래 중에 ‘어이 얼어자리’를 몇 달 동안 연습했다. 막상 연산 앞에서는 부각이 되지 않았지만, 감독님이 OST를 종용하시더라. 결국 일주일 만에 ‘사랑이라고’를 녹음했다. 에피소드가 있다. 녹음을 했는데, 연습 때가 더 괜찮더라. 그래서 연습용 앞부분이랑, 본 녹음 뒷부분을 합쳤다.”

시작은 정통 사극이었지만, 퓨전 사극으로 귀결된 ‘역적’의 장르는 결국 사극이다. 사극의 특징은 시국의 풍자에 용이하다는 것 외에도 세상을 미시 아닌 거시로 바라본다는 점. 그리고 이것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불러온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지극히 개인적 생각을 내뱉지만, 안방극장은 하나의 대사에 여러 갈래의 생각의 나래를 펼친다. 극중 숙용 장씨(이하늬)의 대사가 그랬다. 그는 가령에게 “너는 사랑을 얻었고, 나는 세상을 얻었다”라고 말한다.

세상이라는 단어는 현실에서는 경제 혹은 물질로 치환될 수 있을 테다. 가령 아닌 채수빈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모두 포기하는 방법도 있겠다고 부연설명을 붙이자 그는 “모르겠다. 어렵다. 하지만 나는 세상 대신 사랑을 택할 것 같다.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가령이만큼 이렇게 헌신적인 행동을 힘들겠지만, 그래도 세상과 사랑 중에 선택을 한다면 역시 사랑을 선택할 것이다.”


세상과 사랑 사이에서 사랑을 택한 ‘사랑바라기’ 채수빈의 데뷔작은 2014년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이다. 배우는 연기만 집중하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아이돌이 연기자의 역할을 겸하는 것이 현실. 이 가운데 연기를, 그것도 연극으로 배우를 시작했다는 점은 감탄사를 한 곳에 집중시킨다. 물론 무대 위의 공연이 보다 고차원의 연기는 아니다. 하지만 많은 배우들이 연극 무대를 그리워한다. 2017년만 해도 류승완, 조동혁 등이 대학로 무대 위에 올랐다.

무대와 브라운관의 차이점을 묻자 “연기의 맛을 본 것 같다”라는 대답이 취재진에게 던져졌다. 맛. 비유적 표현이지만,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이상 쉽게 쓸 수 없는 표현이다.

“사실 텔레비전 연기를 하면, 물론 댓글이라든가 시청자 분들의 코멘트도 있지만 공감이 직접적으로 닿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데 연극은 무대에서 관객 분들과 직접 소통을 한다. 내가 웃었을 때 함께 웃어주시고, 눈물을 흘릴 때 같이 울어주시고. 이런 에너지가 정말 많이 오더라. 덕분에 지금까지 연기를 재밌게 할 수 있는 것 같다. 행복하다. 연기 할 때 같이 느낀다는 것 자체가.”

채수빈의 연극 경험은 데뷔작뿐만이 아니다. 그는 2016년 두 번째 연극 ‘블랙 버드’에서 우나 역을 공연했다. 하지만 한 줄의 문장으로 그치는 것이 아쉬운 연기 열정이 배경에 숨어있었다. ‘블랙 버드’의 첫 무대 날짜와 KBS2 ‘구르미 그린 달빛’의 마지막 방송 날이 겹쳤던 것.

이뿐만이 아니다. 연극을 벗어나서 필모그래피를 훑어보자면 그는 2014년부터 지금까지 약 열 편 이상의 광고와 두 편의 뮤직비디오, 약 열 편 이상의 영화 및 드라마에 모습을 비췄다. 그는 강요나 억지는 없었다고 말했다. 또, 감사하다고 말했다.

“안 쉬고 일했다. 하지만 그만큼 내가 재밌게 즐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정이었다. 사실 회사에서 억지로 시켰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 이야기를 나눴고, 오히려 회사에서는 휴식을 추천했다. ‘블랙 버드’와 ‘구르미 그린 달빛’은 연습 기간이 겹칠 뿐더러, 일정이 힘들었지만 대표님과 내가 하겠다고 욕심을 부렸다. 육체적으로 힘들었고, 감정 소모도 컸지만 나에게 남는 것이 많았다.”

“최근에 느꼈던 점인데, 나의 추억들과 등장인물들의 추억들이 혼재됐더라. 감정이 묘했다. 다양한 삶을 경험해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앞으로도 다양한 인물을 만나고 싶다.”

마지막으로 ‘역적’은 채수빈에게 어떤 작품인지 물었다. ‘역적’에서 채수빈이 연기했던 가령은 홍길동의 활약을 ‘홍첨지뎐’이라는 책으로 엮었다. 가령이 그러했듯, 채수빈은 ‘역적’을 어떻게 갈무리할지 궁금했다.

“보면서 뿌듯했던 드라마였다. 대본을 읽으면서 소름이 돋았다면, 화면을 볼 때는 기분이 짜릿했다. 더불어 현재 시국과 너무 잘 맞아 떨어지는 작품이었다. 현대와 과거가 함께 나아가는 느낌을 받았고, 백성들이 힘을 합쳐서 뭔가를 해냈다는 것이 계속 뿌듯했다.”


인터뷰 중간 채수빈의 연기론을 물었다. 어떤 배우는 연기는 기술이지만, 경험을 토대로 둔다면 더욱 현실성 있는 연기가 나온다고 밝혔던 바 있다. 현대극도, 근대극도 아닌 조선 시대 배경의 사극. 게다가 퓨전이라는 가벼움이 덧칠되었지만, 결국 비장미가 강조된 영웅의 내조를 연기하는 것에 대한 막연함은 없었을까.

그는 간접 경험의 재미를 언급했다. “길동이에게 나 아이 가졌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마지막에 있다. ‘액션’ 소리와 함께 촬영에 들어갔는데, 벅찬 감정은 짐작되더라도 구체적인 것은 잘 모르겠더라. 감독님이 아이를 가지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차근차근 설명해주셨고, 다행히 조금은 실마리가 보였다. 이 직업의 매력이 그런 것 같다. 처음에는 모호하고 어떤 감정인지 잘 모르겠더라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다는 것. 완벽하진 않지만 간접 경험에서 배워나가는 것이 있다.”

모호함, 실마리, 간접 경험 그리고 배움. 연기는 예술이다. 또 열정으로 요약되는 몇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결국 직업이다. 가치 실현이라는 가치와 함께 노동이라는 현실이 공존한다. 이 가운데 채수빈은 모호하지만, 실마리가 보였고, 간접 경험 속에, 배우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

물론 힘든 것을 힘들다고 말할 수 없는 공적인 장소에서의 인터뷰였다. 그럼에도 그의 말에는 무엇 하나를 배웠다는 뿌듯함이 취재진에게 전달됐다. 4년 차 배우 채수빈.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만성일 수도 있는 시기지만, 여전히 배움에 감사하는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사진출처: bnt뉴스 DB, MBC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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