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하루’ 김명민이 전하는 상실 속 가족의 소중함

입력 2017-06-17 11:50  


[김영재 기자] “두려워하면 안주하게 되는 것 같다”

배우 김명민은 22년 차 배우다. 1996년 데뷔했고,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약 스무 편이 넘는 작품들에 출연했다. 22년 차, 1996년, 스무 편. 인생을 숫자로만 평가하는 것은 빡빡하고, 매정하고, 기계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숫자는 간접 경험의 창구다. 김명민이라는 배우를 모르는 사람도 그를 추측할 수 있는 단초기도 하다. 경험이 많은, 연기의 정도(正道)를 찾았을 것 같은. 숫자로 접하는 김명민은 그런 배우고, 사람이다.

“자식 같이 생각을 하고 있다. 정말 좋은 길로, 정석의 배우의 길로 잘됐으면 좋겠다”라며 소속사 후배 배우 최태준을 언급하는 김명민에게, 그렇다면 배우가 걸어야 할 정석의 길은 무엇인지 물었다. 아마 배우도 면접에 의해 당락이 결정된다면 면접관이 필수적으로 건넸을 질문. 경력을 켜켜이 쌓아온 김명민의 답은 기자가 귀를 쫑긋하게 만들었다.

사실 인터뷰 현장은 배우와 취재진 사이에 가상의 유리 벽이 서있는 공간이다. 쫑긋할 여유는 없다. 그렇지만 김명민은 달랐다. 답을 기대하게 만들고, 동시에 여유를 안겨줬다. 해당 질문은 여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연기만 생각하는 배우다. 다른 것 대신 연기만 신경 쓰는 배우. 돈을 쫓아가고, 인기를 쫓아가면 10년 후 주변에는 삼류들만 모이게 된다. 그런데 연기에 대한 지향점을 찾아갔더니 똑같은 시간 후에는 하이 퀄리티(High Quality)의 사람들이 내 주변을 감싸고, 덩달아 돈과 명예도 따라와 있더라.”

또한, 그는 “본질을 쫓아가라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자꾸 여러 가지 요소들을 생각하고, 챙기게 된다. 기타를 생각하지 말고, 그냥 내가 원래 하고 싶은 본질만 가지고 가면 훗날 좀 돌더라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주변에는 밝은 기운들이 오게 된다.”

1996년에도, 2017년에도 배우로서 살아가고 있는 김명민은 배우에게는 연기가 본질이라고, 또 사람은 저마다의 본질을 쫓아야 한다고 소개했다. 돌이켜보면 어떤 분야든 전문가는 초보자에게 무엇이든 기본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듣는 이는 순간에는 그것을 가슴에 새길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금세 잊은 채 또 다른 해답을 갈구한다. 효과가 없는 탓일까. 아니다.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닌 답을 구하는 행동 자체에 중독된 것이다.

하지만 이 가운데 만난 김명민의 해답은 조금 특별하게 다가왔다. ‘밝은 기운’이라는 생소한 표현도 한 몫 했지만, 듣는 이를 설득하기 위한 목적성보다 본인의 경험을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전달성이 더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여기 본질을 쫓는 한 남자의 신작이 2017년의 6시 15분인 6월15일 개봉했다. 영화 ‘하루(감독 조선호)’다. 날짜에 시간의 개념을 접목시킨 이유는 이번 영화의 소재가 ‘타임 루프(Time Loop)’이기 때문이다. ‘타임 루프’란 등장인물이 특정 시간대의 처음과 끝을 계속 반복하는 것. 딸이 사고를 당사기 2시간 전을 반복하는 남자가 시간의 비밀을 추적해 나가는 이번 작품에서 김명민은 딸의 죽음이 반복되는 남자 준영 역을 맡았다.


먼저 7일 언론시사회 관람 소감이 궁금했다. 그는 “후회한들 소용없고, 긍정적으로 가겠다”라는 말로 취재진을 긴장시키더니 이내 “괜찮았다”라는 말로 작품을 긍정했다. “스크린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괜찮더라. 중반에 약간 느슨한 부분도 있었지만, 영화가 계속 내리쳐 달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어 김명민은 한국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획일화된 속도감을 경계했다. “중간에 그런 부분들이 있어야, 굴곡이 있어야 영화를 보는 맛이 있다. 요새 영화들은 너무 굴곡이 없다. 문제다. 재미만을 추구한다. 모든 신이 재밌게 표현될 순 없다.”

준영은 비행기에서 잠이 깰 때마다 딸의 구명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루가 반복될수록 공항에서 사고 장소까지의 시간은 단축되지만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그는 “쉽지 않은 캐릭터다, 준영은”이라는 말로 촬영의 어려움을 소개했다. “‘타임 루프’를 거치며 생겨나는 감정의 미묘한 변화들은 미세하게 다 다르다. 그런데 정해진 기간 내에 장소 별로 묶어서 촬영을 해야 되는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아직 내가 연기하지 못한 것의 다음을 연기해야 할 때 너무 괴로웠다. 상상이 안 가는데 뒤 상황을 미리 연기해야 될 때 배우들이 가장 힘들다.”

작품에서 시간이 반복되는 남자는 준영뿐만이 아니다. 배우 변요한이 연기하는 민철 또한 시간의 반복 속에 그의 아내를 구하려고 사투를 펼친다. 한 사람은 아이를, 다른 한 사람은 연인을 살리기 위해 내달리는 상황. 하지만 두 등장인물은 전혀 다른 태도를 관객에게 선보인다. 민철이 살인도 불사한다면, 준영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사건을 멀리서 집중한다. 둘의 상반된 감정은 관객의 감정이입을 돕는다.

그는 “매번 흥분해서 갈 순 없었다. 준영은 시간이 돈다는 것을 알고, 애를 구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을 먼저 깨닫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그때부터는 머리를 써야 했다”라며, “더불어 준영의 감정은 한두 차원에서 끝나는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고민하고, 생각하고, 또 다시 흥분했다가 방법을 찾고, 모색하고. 계속 쌓였다. 민철이보다 집요하고, 계산적인 감정으로 가야 됐다”라고 설명했다.


‘하루’의 하이라이트는 인천 박문여자고등학교 사거리에서 펼쳐진다. 준영과 민철은 이곳에서 딸의 죽음을 목격하고, 아내의 사망을 발견한다. 김명민은 사거리에서의 촬영을 묻자 연기 톤의 목소리로 “그만. 갑자기 생각이 난다. 그만. 떠올리고 싶지 않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매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보조 출연자들과 함께, 같은 상황을 조금씩 다르게 찍어야 하는 그 고통. 배우들끼리 그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의 하루가 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현실과 촬영이 헷갈릴 정도로 3주라는 시간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한 걸음을 떼기가 힘들 정도로 작렬하는 태양, 그늘도 없어, 사람도 없어, 차들도 안 다녀. ‘박문여고’ 사거리. 어떻게 그런 데를 섭외했는지 대단한 것 같다.”

3주의 시간은 김명민에게 극기 훈련이었다고. “그곳에서의 3주가 우리에게 준 것은 뭐든 해낼 수 있다는 의지였다. ‘여기서 이 시간들을 이겨냈으니 이제 웬만한 촬영장 가도 이것보다 더한 데는 없다’라는 생각이 들더라.”

김명민은 ‘박문여고’ 사거리 이야기 도중 조선호 감독을 언급했다. 스태프들 모두가 얼굴이 까맣게 탔고, 감독 또한 피부가 너무 탄 나머지 눈동자만 돋보였다고. ‘하루’는 조선호 감독의 충무로 첫 데뷔작이다. 햇볕에 타든 말든 열정을 불태운 이유는 아마 이번 영화가 그의 꿈을 실현하는 발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호 감독에 대해 김명민은 “입봉작 감독님답지 않게 현장 장악력이 있었다”라고 칭찬했다. 또, 그는 현장에서 고민하는 감독들을 질타했다. “결정 장애 있는 사람이 제일 싫은데 우리 감독님은 그것이 없더라. 결정력이 빨랐다. 그런 사람들이 도 아니면 모인데 우리 영화는 당연히 잘나왔다. (웃음) 일단 현장에서 고민을 오래하시는 감독님들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고민은 현장 밖에서 이미 하고 현장에서는 서로 놀아야 된다. 현장에서 머리 싸매고 고민하시는 감독님들이 계시다. 일단 우리 감독님은 그런 점이 없어서 만족스러웠다.”

영화계는 프로의 공간이다. 프로는 결국 그들의 손으로 빚어낸 결과물로써 가치를 증명한다. 그러나 입봉 감독에게는 결과물이 존재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지만, 프로의 세계에서는 시작은 곧 난관이다. 조선호 감독을 ‘우리 감독님’이라고 표현하는 김명민. 그가 감독의 입봉작에 출연하게 된 배경이 궁금했다.

“나는 그런 편견 없다. 왜냐하면 조선호 감독님께서 제2의 봉준호 감독님, 박찬욱 감독님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어 그는 영화계 발전을 위해서는 입봉 감독들의 연출작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느 정도 안정된 행보를 갖고 있는 배우들은 입봉 감독님의 작푸을 해야 된다. 그런데 자신의 안주를 생각하고, 흥행이 될 법한 작품들만 고르다 보면 이 분들은 누구랑 작업을 하는가. 나는 이 점에 있어서는 항상 열려 있는 사람이다.”


이제 갓 연출을 시작하는 이에게도 너른 가슴을 자랑하는 김명민을 대중이 주목한 첫 작품은 KBS2 ‘불멸의 이순신’이었다. 이후 MBC ‘하얀거탑’ ‘베토벤 바이러스’, SBS ‘시청률의 제왕’, 영화 ‘내 사랑 내 곁에’ ‘페이스 메이커’ 등에서 김명민은 역할과 배우가 동일화된 물아일체의 경지를 선보였다. 하지만 과거에는 인물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최근에는 인물이 처한 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듯 보인다. ‘하루’ 또한 준영이 특별한 것보다 시간에 갇힌 준영의 시간이 특별하다.

그는 “인물에 목표를 두진 않고 항상 보면 시나리오가 일단 재밌는 것을 고르게 된다”라며, “두 번째가 내가 해야 될 역할이 얼마만큼 할 거리가 있는지 본다”라고 운을 뗐다. “누가 와서 해도 되고, 내가 해도 되는 것은 노(No)다. 내가 했을 때 뭔가 이들한테도 도움이 될 것 같고, 또 나도 뭔가 몰라던 부분을 깨면서 보람을 느끼고 싶은 역할을 한다.”

시험대에 올라가는 기분이라도 안주를 걱정하며 결정한다고. “내가 과연 할 수 있을지 고민되는 것은 너무 하기 싫다. 마지막까지 고민한다. 왜냐하면 두려우니까. 잘 되면 괜찮지만, 안 됐을 때 지금까지 쌓아온 평판에 금이 가는 것이 무서우니까. 그런데 두려워하면 안주하게 되는 것 같다. 과감하게 흥행하든 말든 ‘일단 나는 이것을 가겠다’라고 결정하는 결단력은 조금 생긴 것 같다.”

제작보고회에서 김명민은 ‘연기 마스터’라는 세간의 호칭에 관해 “돌아버리겠다. 비수처럼 꽂힌다. 그만 했으면 좋겠다”라고 토로했던 바 있다. “‘본좌’ 이런 호칭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스럽게 쓰이는 것 같아서 그렇다. 예전부터 굉장히 부담됐던 표현이다. 안티를 조장하는 호칭 아닌가. 먼저 설레발을 떠는 것이 너무 싫다. 나한테 플러스가 되는 칭호가 있고 마이너스가 되는 칭호가 있는데 분명 마이너스다. 닭살스럽다고 할까. 남들은 쉽게 이야기하더라도 당사자가 들었을 때는 불편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몇 년 전부터 계속 해왔던 이야기인데...” 과중한 기대는 독이라는 진심이 전달됐다.


강식 역의 배우 유재명은 “절망에 빠진 남자들의 가족애와 아이로 표현되는 희망”이라고 ‘하루’의 매력을 표현했다. 그의 말처럼 영화는 준영과 민철의 가족애가 극 전체를 감싼다. 화기애애한 가족 영화는 아니다. ‘끝나지 않는 지옥’이라는 광고 문구와 더불어 아이와 아내가 여러 번씩 죽는 상황이기에 둘의 절실함이 관객을 몰입시킨다. 김명민이 생각하는 ‘하루’는 무엇일지 궁금했다.

“가족을 살리려는 세 남자의 이야기다. 스릴러라고 하지만 그 과정이 미스터리 스틸러지, 결국 메시지는 ‘가족을 다시 한번 생각하자’다. 단순한 내용이지만 ‘타임 루프’라는 소재를 이용해서 가족애를, 끈끈한 가족애를 상기시키는 영화다.” 가정의 달 5월은 이미 지났지만, 가족의 가치는 한겨울이든 한여름이든 영원하다. 물보다 진한 피 아래 묶인 너와 나 그리고 가족. ‘하루’는 가상의 상실 속에서 새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만든다. 영화는 6월15일 개봉했다. 90분. 15세 관람가. 손익분기점 190만 명. 제작비 62억 원.

+α. ‘타임 루프’를 다룬 또 다른 영화는?

‘타임 루프’에는 주체의 능동성이 배제된다. 몸이 재생되고 기억은 보존되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주인공은 왜 하루가 반복되는지 이유를 모른다. 대표적 영화가 빌 머레이 주연의 ‘사랑의 블랙홀’. 성촉절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방문한 일기예보원이 하루를 무한 반복하면서 사랑을 깨닫는 내용으로, 원제 ‘그라운드호그 데이(Groundhog Day)’를 ‘사랑의 블랙홀’이라고 초월 번역한 제목이 인상적이다. 죽음의 반복 속에 외계 종족을 물리치는 톰 크루즈 주연의 ‘엣지 오브 투머로우’도 ‘타임 루프’의 대표작.

이 밖에도 ‘엣지 오브 타임’ ‘7번째 내가 죽던 날’도 삶과 죽음의 반복을 다룬다. 넓게 보면 제이크 질렌할 주연의 ‘소스 코드’도 ‘타임 루프’ 영화다. 왜 대중은 시간 소재의 영화에 열광할까.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한(恨)을 대리 해소할 수 있기 때문 아닐까. 오늘도 관객들은 영화라는 시간 여행에 몸을 싣는다.(사진제공: 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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