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주 기자 / 사진 백수연 기자] 용감한 아가씨에서 당돌한 여대생으로.
배우 김태리는 지난 2016년 시대와 신분, 성의 장벽까지 단숨에 뛰어넘어 스스로 자신의 운명과 사랑을 개척해낸 용감한 ‘아가씨’에서, 영화 ‘1987(감독 장준환)’을 통해 풋풋하고 당찬 ‘여대생’ 연희로 변신해 1980년대를 살아갔던 보편적인 시민을 대변했다.
“저로부터 시작했어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대변할 수 있을 것 같은 지점이 끌렸거든요. 저 역시도 연희를 보면서 공감이 많이 돼 쉽게 선택했어요.”
최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김태리는 데모를 한다고 세상이 변하냐는 영화 속 연희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비관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1987’은 믿음을 만들어준 영화였다고.
“소수의 사람들이 다수의 사람들을 기만하고 속이고 그랬던 것이 참 답답했어요. 이만큼 힘을 합치지 않으면 듣지 않았던 거니까. 사회가 아무리 나쁜 쪽으로 굴러간다 하더라도 어쨌거나 우리는 더 나은 것을 위하여 방향을 선회하려고 노력하고 있잖아요. 또 그게 먹힌다는 거? 영화를 하면서 그것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 같아요. 우리들이 힘을 합칠 수 있다는 것과 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계속 사회에 관심을 가져야하죠.”
영화는 권력의 부당함으로 가득 차있던 그 당시,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기가 막힌 발뺌으로 유명한 故 박종철 군 사망사건을 소재로 여기에 얽힌 진실을 은폐하려는 자들과 이를 세상에 알리려는 자들의 대립으로 구성된다.
‘1987’을 상징하기도 하는 이 같은 억지스러운 발언에 대해 김태리는 “말이 너무 웃기잖아요. 얼마나 사람들을 우습게 알면 그러냐”며, “기자들 불러놓고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냐고요. 그런 말을 해도 숨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거 아니에요? 우리 세대에도 어떻게 저런 거짓말을 했을까 싶은 일들이 많잖아요. 거짓말이 거짓말을 부르고. 시나리오를 보면서 너무 웃기더라고요. 선배님의 연기를 보니 더 소름 돋았어요”라며 황당한 심경을 전했다.
극중 연희의 당찬 깡다구가 배우 김태리로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겉으로 봐주시는 만큼 좋은 정신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요”라며 자신의 강단을 숨겼지만 결코 가려지지 않는 굳센 소신이 느껴졌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어쨌거나 촬영 날은 정해져있고 연기를 해야 하잖아요. 인터뷰도 마찬가지고요. 두렵고 무섭지만 홍보해야하니까 항상 마음을 다 잡는 게 있어요. 그 상황을 싫어하기보다 ‘좀 더 나은 것을 해야지’하면서 준비하고 부족한 것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그런가 하면 연희의 고집과 냉정한 성격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영화의 중반부터다. 연희가 뜻하지 않게 故 박종철 군 사망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대에 휘말리게 되면서 잘생긴 한 남학생과 만나게 된 것. 바로 극중 이한열 열사를 연기한 강동원이다. 연희는 그를 만나면서 알지 못했던 세상의 추악한 면들을 알게 된다.
“시위를 한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며 소리치고 화내는 말들이 부정적이지만 표정은 울고 있어요. 사실 정서적으로는 연희도 공감하는 거죠. 복잡했던 감정과 사건들이 지난 후 광장을 마주했을 때 강하게 와 닿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데모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은 행위라 생각했던 연희가 뜨거운 열기가 하나로 모인 6월의 광장의 모습을 마주하며 ‘희망’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박종철 열사의 이야기로 시작한 영화는 이한열 열사 이야기로 마무리 지으며 연희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남긴다.
“감독님부터 모든 배우와 제작진들이 최대한 진심을 담아서 만든 영화거든요. ‘아가씨’ 때도 그랬지만 ‘1987’도 지나고 나면 굉장히 큰 의미로 남을 것 같아요. 실제 있었던 역사를 영화라는 페이지로 남긴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수행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의미도 있고요.”
‘아가씨’에 이어 ‘1987’까지. 아직 데뷔 2년 차밖에 안 된 배우 김태리의 행보는 굵직하다. 이에 김태리는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잘 사는 자신의 성격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감독님들이 저의 성격을 보고 극중 캐릭터들과 연결시키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연기하는 선배님들을 보면 정말 대단해요. 전 아직 멀었죠.(웃음)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나를 보여드리는 단계는 아직 어려워요.”
‘1987’에 이어 ‘리틀 포레스트’,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까지 2017년 사계절 내내 누구보다 바빴던 김태리. 신년이 다가오는 이 시점에서 올 한해를 돌아본다면 28살의 김태리는 어땠을까.
“정신없이 보냈어요.(웃음) 시간이 많아지면 생각이 많아지고 깊어지는데 그게 좋은 쪽으로 흘러가진 않는 것 같아요. 여기저기 미로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도 하고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아졌어요. 계속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요. 매년 힘들었던 부분이 있었겠지만 이번년도는 특별히 조금 더 고생스러웠어요. 그래도 연말에 이렇게 좋은 영화로 관객들한테 인사를 드릴 수 있어서 좋아요. 어떻게 봐주실지 관객 분들의 반응이 너무 기대돼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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