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항저우에 가면, 누구라도 시인이 된다

입력 2018-03-18 14:47   수정 2023-09-19 17:07


중국이 2016년 G20 정상회담을 항저우에서 개최했다는 사실은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게 시사한다. 이 나라가 세계에 자랑하고 싶은 최고의 도시는 베이징도 상하이도 아니라 항저우라는 것. 항저우는 세련된 도시 미관, 편리한 교통, 무엇보다 예부터 명성이 자자한 아름다운 풍광을 지녔다. 700년 전 중국을 여행한 이탈리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도 일찍이 항저우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라고 극찬했다. 물안개 핀 호숫가와 녹차밭의 짙푸른 녹음 속을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이 문장에 동화되고 만다.

상하이=도선미 여행작가 dosunmi@gmail.com

여행자를 시인으로 만드는 도시

항저우는 상하이에서 남서쪽으로 175㎞, 위도로 보면 제주도와 타이완 섬의 중간쯤에 위치한 도시다. 상하이, 항저우를 비롯해 양쯔강 이남의 도시들, 소위 중국 ‘강남’에는 봄이 이르게 찾아온다. 3월 초면 항저우의 산과 강도 소리 없이 들썩인다. 녹차 나무에 말간 새순이 돋고, 시후 호수(西湖)의 버드나무에는 은은한 연둣빛이 감돈다. 만약 이 풍경을 화폭 위에 담으려면 먹은 조금, 물기는 많게 그려야 할 것이다. 항저우는 사시사철 비 오고 물안개 끼는 날이 잦기 때문이다.

여행자에게는 비 소식이 낭패지만, 시인에게는 더없는 호재다. 중국 시인 중에서도 소동파는 비오는 시후를 특별히 사랑했다. 그는 “시후를 서시에 비유한다면 옅은 화장이나 짙은 화장이나 다 아름답다”고 했다. ‘호수에서 술 마시니 맑다가 비 오네(飮湖上一初晴後雨)’라는 시인데, 시후의 아름다움을 중국 4대 미인 중 한 사람인 서시(西施)에 견준 것이다. 옅은 화장은 비가 와서 흐릿하고 몽롱해진 시후를, 짙은 화장은 쨍한 여름날 연꽃이 만발한 시후를 은유한 것일 테다.

항저우를 여행 중이던 어느 날 아침, 나 역시 비오는 시후에 매료됐다. 가늘고 촘촘한 빗줄기는 화선지가 먹을 흡수하듯 도시의 번잡함과 소음을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멀리 보이는 현대식 마천루가 흐릿하게 지워지고, 풍경이 수묵처럼 번졌다. 너무 많이 들어서 닳고 닳은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옛 사람의 서정이 내 마음속에 훅 파고들었다. 항저우는 그렇게 여행자를 시인으로 만든다.

현대판 시후 10경? 세 가지만 꼭!

항저우는 대운하가 건설된 7세기부터 상업 도시로 도약했다. 907년에는 5대10국(907~979) 중 하나인 오월국의 수도가 됐고, 1129년에는 송나라(960~1279)의 수도가 됐다. 시후는 송나라 소인묵객들의 예찬을 한몸에 받으며 항저우의 동의어로 자리잡았다.

시인들은 봄에는 아침 물안개, 여름에는 흐드러진 연꽃 정원, 가을에는 호수에 비친 보름달, 겨울에는 눈덮여 끊어진 듯 보이는 아치형 다리를 감상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시후에서 완상해야 하는 열 가지 시적인 풍경을 시후 10경(西湖十景)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항저우에서 관리를 지낸 소동파, 백거이를 비롯해 수많은 시인들이 시후의 아름다움을 시로 남겼다. 시뿐만이 아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리는 ‘양산백과 축영대’, 영화 ‘천녀유혼’의 모티프가 된 ‘백사전’에는 시후가 이별의 장소로 등장한다.

시후 북쪽 호반에서 펼쳐지는 초대형 수상 공연 ‘인상시후’는 앞서 언급한 시와 전설의 명맥을 잇는다. 이 공연은 ‘인상류산제’, ‘인상리장’에 이은 장이머우 인상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으로, 시후와 관련된 고사를 모아 한 편으로 각색했다. 100여 명의 배우가 물 위에서 연기하며, 장중한 음악과 화려한 조명이 시후의 풍광을 다채롭게 묘사한다. “눈으로 보는 교향곡을 만들고자 했다”는 장이머우 감독의 연출 의도대로, 이 공연은 2016년 G20 정상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사실 천 년 전에 만든, 그것도 눈이 오거나 보름달이 뜨는 특별한 날에만 즐길 수 있는 시후 10경을 2018년의 여행자가 고스란히 경험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하루 동안 시후를 여행하는 일정이라면 세 가지 정도만 목표로 삼자. 1순위는 소동파가 준설한 쑤디 제방 산책이다. 호수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2.8㎞의 다리인데, 길 양옆으로 탁 트인 호수 풍광이 무척 운치 있다.

그다음엔 샤오잉저우 섬을 둘러보자. 하늘에서 보면 밭 전(田)자 모양의 독특한 섬인데, 여기에 중국 돈 1위안 지폐의 배경지 산탄인웨(三潭印月)가 있다. 산탄인웨는 소동파가 호수에 사는 요괴를 제압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3개의 수상 석등이다. 중국의 추석인 중추절이면 이 석등에 불을 밝히는데, 속설에는 이때 33개의 달이 뜬다고 한다. 먼저 석등마다 5개의 구멍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그 불빛이 물 위에 어려 두 배가 된다. 여기에 하늘 위에 뜬 보름달과 호수 수면에 비친 달빛,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의 마음속에 깃든 달빛까지 합치면 총 33개라는 셈법이다. 33개의 달은 기대하기 힘들지만 유람선을 타고 섬에 내려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재미는 충분하다.

마무리 코스는 뇌봉탑에서의 노을 감상이다. ‘백사전’에서 천년 묵은 흰뱀 백소정이 인간 허선과 사랑에 빠진 죄로 갇혔던 탑이 바로 이곳이다. 5층 높이의 전망대에 오르면 너른 호수와 주변 지역을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다.

청명절에 맛보는 황금 같은 녹차의 맛

녹차 향기는 항저우 봄 여행을 부추기는 또 하나의 전령이다. 한 해 중 가장 좋은 녹차가 바로 4월5일께 청명절(淸明節) 전후에 나오기 때문이다. 이때 처음 돋은 새순으로 만든 녹차를 밍첸차(明前茶)라고 하는데, 가장 비싸고 그 맛도 일품이다.

청명절 전에는 토양에 영양분이 많고, 벌레가 적어서 잎이 신선하고 향이 그윽해진다고 한다. 이맘때 항저우 다원에서는 “3일 빠르면 황금이 되고, 3일 늦으면 쓰레기가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분주해진다.


항저우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차 품종은 중국 10대 명차로 꼽히는 룽징 녹차다. 항저우는 차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당나라의 저술가 뤼위가 세계 최초의 차 백과사전 《다경(茶經)》을 저술한 곳이기도 하다. 이 책에 따르면 8세기부터 녹차를 재배해 마셨다고 하니, 항저우야말로 명실상부한 중국 녹차의 본고장이라 할 만하다.

녹차 수확철인 3월부터 5월 말까지는 싱그러운 차밭을 거닐며 갓 수확해서 덖은 차를 맛볼 수 있다. 시후 호수에서 출발하는 27번 버스를 타면 주요 다원이 모여 있는 룽징 차마을에 내려준다. 야트막한 산기슭에 층층이 자리 잡은 차밭은 한눈에도 천혜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주변의 높은 봉우리가 겨울에는 찬바람을 막아주고, 여름에는 서늘한 온도를 유지시켜준다.

룽징 차밭에는 여행자를 위한 ‘스리랑당’ 산책로가 있다. 계단을 따라 차밭을 한 바퀴 둘러볼 수도 있고, 주변 계곡이나 대나무 숲길까지 긴 산행에 나설 수도 있다. 지금은 여행자가 걷는 길이지만, 옛날에는 보따리 행상들이 다니며 이 길을 닦았다. 보부상들의 짐보따리에서 나는 ‘딩링당랑’ 소리를 따서 ‘랑당길’이라고 부른 것이 스리랑당의 유래다.

룽징 차 마을에는 단 18그루의 독특한 차나무가 있다. 18그루의 황제 차나무(十八御茶)는 청나라 6대 황제인 건륭 황제(1736~1795)의 성은을 입었다. 건륭황제는 63년 4개월간 통치하며 청나라의 문화·경제적 전성기를 일군 왕인데, 녹차를 무척 즐겼다. 강남을 순시할 때마다 매번 항저우에 들렀고, 십중팔구는 룽징 마을에 들러 차를 마셨다. 룽징차를 마셔서일까? 건륭 황제는 역대 중국 황제 중 가장 장수한 황제이기도 하다.

민담에는 그가 룽징 마을에서 우연히 얻은 녹찻잎으로 위중한 대비를 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황제는 기뻐하며 그 잎이 난 차나무를 황제의 나무로 봉했다. 20그루 중 남아 있는 18그루가 바로 스펑산 기슭의 황제 차나무다. 흥미로운 고사 덕분에 스펑산의 룽징차는 ‘스펑룽징’이라 불리며, 룽징차 최고의 브랜드가 됐다.


찻집부터 박물관, 식당까지 녹차의 천국

항저우에서는 특별히 차관을 찾아다니느라 고생할 필요가 없다. 항저우 시내에 찻집만 700곳이 넘고, 시후 호수 주변의 식당이나 카페에서 흔하게 룽징 녹차를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차 문화가 발달한 중국에서는 찻잎을 어떤 물에 우리느냐에 따라 차맛을 가리기도 한다. 항저우에서는 중국의 3대 샘물로 꼽히는 후파오천 샘물로 우린 룽징차를 최고로 친다. 두 가지의 환상적인 조합을 일컬어 시후쌍절이라고도 부를 정도다.

시후 서쪽 지구의 시후톈디(西湖天地)에 가면 현대식 차관과 전통 차관이 여럿 있다. 야외 테라스에서 시후 호수를 바라보며 마시는 녹차 한 잔은 그야말로 봄날의 맛이다. 홍차와 달리 녹차는 늘 투명한 유리잔에 찻잎 그대로 담겨 나온다. 뜨거운 물에 찻잎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모습에 눈까지 즐거워진다.

우리나라 인사동과 비슷한 풍물거리인 허팡제나 룽징 차마을에서 가까운 중국차엽박물관은 예쁘게 포장된 차 패키지를 구입하기 좋은 곳이다. 중국차엽박물관에서는 차를 주제로 한 전시와 차밭도 함께 구경할 수 있다. 녹차를 테마로 한 식당을 찾는다면, 뤼차찬팅을 추천한다. 메뉴는 강남식 오리탕, 녹차 생선구이, 개구리볶음 등 지역색이 강한 음식뿐 아니라 만둣국과 스프링롤 등 퓨전요리도 많다. 중국 강남 요리에 광둥의 맛을 접목해 한국 사람의 입에도 낯설지 않다.

여행메모

▲추천시기 : 녹음이 짙어지는 봄과 초여름이 여행의 적기다. 7월부터 8월까지는 연중 비가 가장 많이 오고 기온이 높은 달이라 피하는 것이 좋다.

▲추천일정 : 상하이와 연계해서 당일이나 1박2일로 여행할 경우 시후 호수를 중심으로, 항저우만 중점적으로 여행하고 싶다면 3박4일 일정으로 시후와 룽징 녹차마을을 함께 둘러볼 것을 추천한다. 필자의 저서 《리얼 상하이》에 보다 자세한 여행 정보를 소개했다.

▲항공편 : 아시아나항공과 중국국제항공이 인천~항저우 노선에 하루 한 편씩 매일 취항한다. 상하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항저우까지 이동하는 방법도 있다. 상하이 푸둥국제공항에서 항저우행 장거리 버스를 이용하면 3시간이 소요되며, 기차의 경우 훙차오역에서 고속열차를 타면 1시간 이내에 도착한다.

▲시내교통 : 택시 이용을 추천한다. 항저우 사람들은 소득 수준이 높고, 유서 깊은 관광도시에 산다는 자부심이 크다. 중국의 다른 도시에 비해 관광 서비스가 선진적이고, 택시기사들도 친절하다. 목적지를 미리 중국어로 적어가면 웬만한 곳은 30위안 이내에 오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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