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인 최철희 일리아스바이오로직스(옛 셀렉스라이프사이언스) 대표(52)가 평소 제자들에게 하는 충고다. 판에 박힌 연구에 매몰되지 말라는 조언이다. 신경면역학, 세포신호전달 분야 전문가인 최 대표가 낯선 분야인 나노생물학에서 창업 기회를 잡은 것도 이런 평소 소신과 무관치 않다.
일리아스바이오로직스는 생체 나노물질인 엑소좀을 활용해 특정 부위에 약물을 전달하는 방식의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최 대표는 “빛에 반응하는 단백질의 특성을 활용해보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획기적인 약물 전달 원천기술을 확보했다”며 “회사를 글로벌 엑소좀 연구의 메카로 키우는 게 꿈”이라고 했다.
의사에서 과학자로
최 대표는 서울고 재학 시절 천체물리학자가 꿈이었다. 하지만 과학자의 꿈을 펼칠 기회가 없었다.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의대에 진학했다. 연세대 의대에 차석으로 입학할 만큼 성적이 뛰어났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위계질서가 강한 의대 특유의 상하 문화도 견디기 힘들었다. 신경과를 전공 분야로 선택한 것도 그나마 연구 성격이 강한 분야라는 판단에서였다. 전공의 시절 환자 소변줄을 빼다가 창밖으로 대학 도서관 불빛이 보이면 절망감이 들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병원이 아니라) 저 곳인데…” 하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그의 유일한 탈출구는 연구하는 시간이었다. 병원일을 마치면 밤이 늦도록 신경면역학, 교세포 등의 연구에 골몰했다. 일종의 일탈이었다. 당시는 전공의가 연구논문 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환자 진료를 열심히 보는 게 최고 덕목이었다. 하지만 어렵사리 쓴 연구논문이 최 대표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미지의 영역이던 교세포를 다룬 최 대표의 논문을 높이 평가한 미국 앨라배마주립대 세포생물학연구실에서 연구원직 제안을 해왔다. 최 대표는 달갑잖던 의사생활을 훌훌 털고 과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앨라배마주립대에서 3년 넘게 연구원 생활을 하던 최 대표는 2002년 이화여대 교수로 임용됐다. 2005년에는 KAIST로 자리를 옮겼다.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라”며 300억원을 기부한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 덕분에 생긴 바이오시스템학과(바이오및뇌공학과 전신)에 합류했다. 물리 화학 기계공학 의학 등의 융합연구를 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오류에서 찾아낸 ‘창업 아이디어’
‘연구광’으로 불리던 최 대표는 KAIST 교수로 옮기고 난 뒤 파격적인 연구성과를 잇따라 냈다. 남들은 오류라고 여기고 넘어갔을 현상들에 천착한 덕분이었다.
첫째가 당뇨발 진단기기다. 혈관에 주입된 근적외선 조영제를 광학영상장비로 촬영해 분석하는 방법으로 혈액의 흐름을 실시간으로 계산하는 ‘말초조직의 기능적 혈액관류 측정기술’을 개발했다. 2009년 뷰웍스에 기술이전하는 성과를 냈다. 혈관 형성을 살펴보는 용도로 쓰던 조영제로 동물실험을 하던 도중에 기존 가설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을 발견한 것이 단초가 됐다.
둘째는 세계 최초로 개발한 신경세포 약물 전달 기술이다. 레이저를 활용하면 꽉 닫혀있는 뇌 혈관장벽이 순간적으로 열리는데 이때 뇌로 약물을 전달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세번째가 엑소좀이다. 30~200나노미터(㎚·10억분의 1m) 크기의 소포체로 세포 또는 기관 간에 메신저 역할을 하는 엑소좀은 약물전달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엑소좀에 정량의 약물을 탑재하고 이를 원하는 조직이나 세포로 정확하게 전달하는 기술 확보는 어려운 과제로 꼽힌다. 최 대표는 세포가 빛에 반응하는 원리에 착안해 엑소좀에 약물을 탑재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애기식물장대에서 유래한 두가지 단백질이 450~490㎚ 파장의 푸른빛을 쏘면 서로 결합하는 특성을 활용한 것이다.
최 대표는 “기존 기술에 비해 비용이 낮으면서도 효율성과 안정성이 향상된 치료용 단백질 전달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이 연구결과는 2016년 7월 국제학술지 네이처커뮤니케이션즈에 실렸다. 엑소좀 약물전달 기술은 국내 특허를 취득했고 미국 등 10여개국에 특허가 출원된 상태다.
엑소좀은 60조개에 이르는 인체 내 세포끼리 주고받는 일종의 편지다. 단백질, 핵산, 지질 등 원세포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담겨있다. 암세포도 자신만이 갖고 있는 암 전이 특이 단백질을 엑소좀에 담아 내보낸다. 이 때문에 엑소좀 진단을 통해 특정 질병을 조기에 감지할 수 있고 치료제로도 활용할 수 있다. 최 대표는 “엑소좀은 원래 우리 몸에 다량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면역문제가 없고 생체적합성이 뛰어나다”며 “질병 진단은 물론 치료 분야에서 파괴적 잠재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말했다.
“엑소좀 가능성은 무궁무진”
최 대표는 2015년 11월 창업전선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차가웠다. 논문을 함께 썼던 제자조차 창업을 말렸다. 엑소좀의 잠재력은 컸지만 기술을 상업화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장애물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엑소좀 기술은 탈곡 전단계였어요. 쌀알을 만들지 못한 단계였죠. 제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연구성과가 사업화로 이어지지 않고 사장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엑소좀을 포기하기가 너무 아까워 창업을 결심했습니다.”
최 대표는 서두르지 않았다. 자금을 댄 벤처캐피털과 엔젤투자자들에게는 “10년 내에는 투자금 회수가 어려울 것”이라고 공언했다. 엑소좀 치료제 개발까지 가야할 길이 멀다는 판단에서였다.
엑소좀은 워낙 작다보니 혈관이나 소변 등으로 빠져나가 생체 내에서 통제가 용이하지 않다. 대량생산을 위한 기술적 난제도 쌓여있다. 이 때문에 엑소좀 치료제 임상에 진입한 곳은 췌장암 치료제를 개발 중인 미국 바이오기업 코디악바이오사이언스가 유일하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허가를 받은 엑소좀 치료제도 아직 전무하다.
현재까지 개발된 치료용 엑소좀 기술은 1세대, 2세대, 3세대로 나뉜다. 일부 세포 치료제의 효과를 대체함으로써 특정세포의 아바타 역할을 하는 1세대 엑소좀 기술은 보편화됐다. 엑소좀에 약물이나 핵산 등을 주입하는 2세대는 코디악바이오사이언스 등 바이오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다.
일리아스바이오로직스는 고분자 단백질도 엑소좀에 집어넣을 수 있는 3세대 기술을 갖고 있다. 크기가 큰 고분자 단백질의 경우 엑소좀 안에 넣기 어렵기 때문에 도넛에 설탕가루를 묻히듯 엑소좀 바깥에 붙여놓는 방식을 쓰는 대다수 바이오기업들과는 차별화된 기술이다. 최 대표는 “단백질을 엑소좀 안으로 넣지 못하면 정확한 정보 전달이 어려운데다 항체에 따라 안정성 문제 등도 생긴다”고 했다.
패혈증·고셔병 신약 ‘도전’
일리아스바이오로직스의 신약 후보물질(파이프라인)은 패혈증 치료제, 고셔병 치료제 등 2종이다. 이 회사는 염증을 조절하는 엑소좀을 만들고 있다. 우선 치료제가 없는 패혈증을 적응증으로 동물실험을 마쳤다. 내년 중반께 미국과 한국에서 임상을 시작하는 게 목표다. 고셔병 치료제는 미국에서 내년 임상을 시작하고 한국서는 추후 임상을 실시할 계획이다.
시장이 큰 항암제 보다 희귀질환 치료제 개발에 나선 배경은 엑소좀 치료제의 상용화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서다. 패혈증 등 다른 치료 대안이 없는 질환 치료제는 일반 치료제보다 판매 허가까지 걸리는 기간이 짧다. 최 대표는 “엑소좀이 환자 치료제에 쓰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 희귀질환을 적응증으로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일리아스바이오로직스는 미국 시장 공략에 집중한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지난 1월 말 뉴욕에 지사를 설립했다. 올해 중에 휴스톤에 연구소도 세울 계획이다. 최 대표는 “엑소좀의 잠재력이 많이 알려진 만큼 사업 행보를 보다 공격적으로 하려고 한다”며 “세계 최대 의약품 시장인 미국 시장을 선점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말했다.
“엑소좀 연구 메카로 키울 것”
일리아스바이오로직스는 기초 발굴단계의 파이프라인 30여개도 확보했다. 하지만 당분간은 임상1상을 준비 중인 패혈증 치료제와 고셔병 치료제 개발에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벤처캐피털에서 투자 받은 183억원도 이들 파이프라인의 임상에 쓸 예정이다. 다국적제약사 등에 기술이전도 검토하고 있다.
최 대표의 꿈은 글로벌 엑소좀 연구를 주도하는 것이다. 엑소좀이 환자 치료에 폭넓게 활용되도록 기술 토대를 갖춰 인류 건강에 공헌하겠다는 목표도 갖고 있다. 그는 “회사 경영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연구에 전념하고 싶다”며 “기초연구에서 임상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엑소좀 기반 치료제를 개발하는 연구자들에게 롤모델이 되겠다”고 말했다.
일리아스바이오로직스는 주말 근무나 초과근무가 거의 없다. 업무 효율과 창의적 근무 환경을 중시하는 최 대표의 경영 방침 때문이다. 그는 임직원들에게 천편일률적인 근면과 성실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연구자들이 창의성을 발휘하려면 여유가 있어야 한다”며 “즐겁게 일하는 분위기여야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고 했다.
박영태 기자 py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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