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빌리티 생태계 빨리 완성할 수 있어
지난 5일, 스위스 제네바모터쇼 현장에서 거대 자동차제조사와 이제 막 전기차를 만들겠다며 스타트업을 선언한 조그만 기업이 흥미로운 자리를 만들어냈다. 먼저 연간 1,000만대를 넘게 생산하는 폭스바겐그룹의 허버트 디이스 회장이 연단에 올랐다. 그는 "폭스바겐그룹이 유럽의 전동화 전략을 주도할 것"이라며 "MEB 플랫폼 위에 만들어진 I.D. 버기는 올해 말 시장에 선보일 e-골프로 발전하고, 티구안 크기의 SUV 비전(Vision) 역시 주요 플랫폼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나아가 전기버스 개발도 승인을 받았다며 해치백, 세단, 멀티버스까지 이르는 핵심 전동화 제품을 보유할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다.
이 때 사회자가 플랫폼 공개 여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디이스 회장은 주저 없이 "전동화 세상에선 엔진 실린더가 몇 개인지, 변속기와 기어박스가 어떤 것인지 중요하지 않다"고 전제한 뒤 "하나의 플랫폼을 다양한 제조사가 활용토록 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소형차부터 버스까지 적용 가능한 동일한 플랫폼으로 더 많은 전기차를 만드는 것이 낫다는 의미다. 그래서 필요한 경우 경쟁사에게도 플랫폼을 제공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뒤 이어 폭스바겐 MEB 플랫폼의 첫 고객으로 귄터 슈(Günther Schuh) 교수가 소개됐다. 슈 교수는 자동차 생산 전문가이자 모빌리티 스타트업 '이고(e.GO)'의 창업자로 제네바모터쇼에 직접 제조한 원박스 자율주행 승합차를 출품해 주목을 끌었다. 슈 교수에게 사회자가 물었다. "디이스 회장이 먼저 손을 내민 것인가?" 그러자 슈 교수는 "소량 생산이 가능한 이고의 아이디어와 폭스바겐 플랫폼이 만나 다양한 모빌리티가 생산된다는 상상이 현실이 될 것 같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디이스 회장은 직접 플랫폼 제공에 대한 배경을 말했다. 그는 "이고는 소량 생산 능력을 가진 기업이고 폭스바겐그룹은 1,000만대를 만드는 곳"이라며 "특정 이동 수단이 필요한 곳에 대응하는 능력은 소량 생산 기업이 유리한데 이 때 플랫폼을 폭스바겐이 제공하는 것은 '윈-윈'이자 전동화의 대중화를 앞당길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폭스바겐그룹의 이 같은 플랫폼 공유는 그룹이 밝힌 미래 전략의 단계별 접근과 무관치 않다. 지난해 6월 독일 하노버에서 열린 세빗(CEBIT) 박람회에서 폭스바겐그룹은 미래 모빌리티 서비스 완성을 위해 5단계 전략을 내놓은 바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자율주행시스템의 공급자이고 2단계는 시스템 제공자, 그리고 3단계는 자율주행 이동 수단의 대량 생산 및 활용, 4단계는 모빌리티 공급자, 마지막은 컨텐츠 공급자로 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 가운데 플랫폼 공유는 3단계로 가기 위한 하드웨어의 접근이다. 폭스바겐그룹이 모든 제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전동화 시대에는 아이디어 제품을 만드는 스타트업에게 플랫폼을 제공, 궁극적으로 폭스바겐 제품 DNA 확산이 중요하다는 것. 굳이 'VW' 엠블럼을 달지 않아도 폭스바겐 DNA가 들어가야 그룹이 지향하는 미래 이동 수단 플랫폼 공유 시대가 열리고, 이 때 핵심인 자율지능을 넣으면 폭스바겐그룹 주도로 모빌리티 서비스를 완성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이 자리에서 '이고'의 슈 교수 또한 비슷한 맥락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작은 기업은 제조량이 적어 많은 것을 비싼 가격에 살 수 밖에 없지만 폭스바겐그룹과 플랫폼 협력을 하면 저렴하게 조달이 가능해 경쟁력이 커진다고 말이다. '이고'가 전동화 된 자율주행 셔틀로 이동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자체가 폭스바겐과 경쟁하는 게 아니라 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는 역할이고, 이 경우 폭스바겐그룹이 해당 제품을 생산하기보다 소량 생산 및 개발에 특화된 기업이 역할을 대신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광경을 목격하면서 국내에서도 모빌리티 기업들의 활성화를 위해 플랫폼 공유 가능성을 떠올렸다. 이미 여러 중소기업이 전기차 관련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만 플랫폼이 없어 개발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곳이 적지 않아서다. 따라서 정부가 특정 기업의 기술 개발이 아니라 필요한 모빌리티를 누구나 만들 수 있도록 전기차 공용 플랫폼 개발을 지원하고, 여기서 나온 결과물은 스타트업 누구나 변형해 사용할 수 있도록 협업하는 방식이다. 이동의 성격에 따라 필요한 이동 수단도 달라지는 세상이고, 그 자리를 스타트업들이 메우도록 하는 협업 가능성을 폭스바겐그룹이 먼저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권용주 편집장 soo4195@auto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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