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끝내 ILO 비준 강행…勞에 굴복

입력 2019-05-22 17:44   수정 2020-11-18 16:00


정부가 해고자와 실업자의 노동조합 가입 허용 등을 핵심으로 하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절차에 들어갔다. 관련 국내법을 먼저 개정하고 나중에 국회 비준 동의를 받겠다는 ‘선(先) 입법, 후(後) 비준’ 방침을 뒤집은 것이어서 파장이 우려된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22일 브리핑에서 “ILO 핵심협약 중 미(未)비준 네 개 협약 가운데 결사의 자유와 단결권, 강제 노동 금지 등을 규정한 세 개 협약의 비준 동의 절차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또 “올해 정기국회에 비준 동의안을 제출하고 비준에 필요한 법 개정도 동시에 논의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ILO 핵심협약은 △결사의 자유 △강제 노동 금지 △아동 노동 금지 △균등 대우 등 네 개 분야의 여덟 개 협약을 말한다. 한국은 이 가운데 결사의 자유와 단결권을 규정한 87·98호, 강제 노동을 금지하는 29·105호를 비준하지 않고 있다. 정부는 105호는 비준을 유보하기로 했다.

정부는 노동관계법 개정과 비준 동의안을 동시에 처리하겠다는 방침이지만 여야 간 입장 차가 워낙 커 국회 통과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자칫 여야 대치정국 속에 비준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산업현장에는 일대 혼란이 야기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해고자·실업자의 노조 가입은 물론 현행 6급 이하만 가능한 공무원 노조 가입 범위 확대, 법외 노조 상태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합법화 등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지난해 7월부터 비준문제를 놓고 사회적 대화를 해왔으나 지난 20일 논의를 종결했다. 합의문 대신 내놓은 공익위원안에는 파업 시 대체근로 허용, 부당 노동행위 처벌 폐지 등 경영계 핵심 요구사항은 빠졌고 노동계 요구만 대거 포함됐다. 노동계는 일제히 환영한 반면 경영계는 우려를 나타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정부가 법 개정 근거로 삼겠다는) 경사노위 공익위원안은 합의안이 아니라 노동계 입장에 편향된 안”이라며 “대립적·갈등적·불균형적 노사관계 속에서 단결권만 확대할 때 예상되는 부작용이 매우 크다”고 우려했다.


해고·실업자도 노조 가입 허용…경영계 "노동계로 더 기울어졌다"

“해직자가 노동조합 간부 자리를 꿰차고 앉아 근로자 임금을 올리라고 할 판이다.” “‘직업이 노조위원장’인 사람들이 급증할 것이다.”

대기업 노무담당 임원들의 탄식이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22일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3개의 비준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하자 나온 반응이다. 이들은 “보완책 없이 핵심협약만 비준하면 ‘노조 천국’이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영계는 우려, 노동계는 환영

고용부는 ILO 핵심협약 비준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등 노동 관계법 개정을 동시에 추진하기로 했다. 국회에서 법 개정 없이 비준안만 처리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비준안이 먼저 통과되면 ILO 등 국제 사회와 노동계의 거센 압박에 밀려 관련 법들이 별다른 보완장치 없이 개정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기업들은 ILO 핵심협약 중 ‘결사의 자유와 단결권 보호(제87호)’ ‘단결권과 단체교섭 보장(제98호)’ 조항이 경영 활동을 크게 위축시킬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해고자와 실업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고 노조 전임자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다. 5급 이상 공무원의 노조 조직과 가입도 가능해진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과도한 정치 활동으로 해고된 전문 꾼들이 노조 간부 자리에 앉아 회사 월급을 받으면서 정치파업을 선동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걱정했다. 강성노조가 노조위원장 등 노조 전임자의 임금을 대폭 올려달라고 요구하면 기업은 들어줄 수밖에 없어 ‘노동 귀족’이 양산될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노동계에선 단결권 관련 ILO 핵심협약의 비준과 관련해 하청업체 노조가 원청을 상대로 임금·단체협약 교섭을 요구하는 것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로자는 고용과 관련된 반노조적 차별행위에 대해 적절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98호)에 근거해서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부터 일감을 하청받는 국내 산업구조에 맞지 않다는 게 경영계의 지적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수백 개 하청업체 직원들이 원청인 대기업을 상대로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고 나서면 업무가 마비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노동계는 일제히 ‘환영’ 성명을 내놨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이날 “정부의 ILO 핵심협약 비준 추진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논평을 냈다. 민주노총은 “비준안 처리와 관련법 개정 과정에서 파업 시 대체근로 허용 등 경영계 주장을 받아들이면 전면 대결에 나설 것”이라는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강제노동 금지에 관한 협약(제29호)에 대해선 사회복무요원 등 대체복무 제도를 손질해야 한다는 게 고용부의 입장이다. 이 장관은 “(보충역 판정을 받더라도) 본인이 원하면 현역병으로 갈 수 있는 선택권을 주면 협약을 충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울어진 운동장부터 바로잡아야”

경영계는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면 노동권이 강화되는 만큼 노사 힘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호소한다. 파업 시 대체근로 허용, 사업장 점거 파업 금지, 파업 찬반투표 시 유효 횟수와 기간 명시, 부당노동행위 형사처벌 폐지,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2년→최소 3년) 등이 대표적이다.

기업들은 특히 ‘파업의 일상화’를 조장하는 현행 노동 법규 및 제도 개선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현행 제도에서 파업은 너무 쉽게 허용하는 데 비해 기업의 대응 수단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노조법상 파업은 ‘조합원 과반수 찬성’ ‘근로조건과 관련된 사안일 것’ 등의 요건만 갖추면 합법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허용하는 파업 시 대체근로는 금지돼 있다. 노조가 생산 라인을 점거하고 파업하더라도 사용자는 신규 채용·하도급·파견 등을 통한 대체근로를 할 수 없어 손실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한다.

ILO조차 대체근로에 대해 ‘원칙 허용, 남용 금지’를 권고하고 있다. 경총에 따르면 파업 때 대체근로를 금지하는 나라는 한국과 아프리카의 말라위뿐이다.

사업장 내 쟁의행위를 막아달라는 것도 경영계의 요구 중 하나다. 해외에선 파업을 위한 집회를 사업장 밖 일정한 공간에서 여는 게 일반적이다. 노조 사무실도 회사 밖에 둔다. 대부분의 쟁의행위가 사업장 안에서 이뤄지는 한국과 대조적이다.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근로자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든 국제 노동기준. 한국은 ILO 핵심협약 8개 중 4개를 아직 비준하지 않았다. 미비준 협약은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87호)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원칙 적용(98호) △강제노동 강요 금지(29호) △강제노동 폐지(105호) 등이다.

백승현/김익환/강현우 기자 arg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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