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재 기자] 1991년 KBS2 ‘토요대행진’서 사랑은 달콤한 것이라 노래할 때도, 2019년 한 방송을 통해 옛 인연을 찾을 때도 심신은 늘 레이밴 선글라스를 고집했다.
“대중 분들께서 기억하시는 제 캐릭터가 있잖아요. 선글라스를 쓴 심신. 그때처럼 지금도 안경을 씀으로써 시청자 분들께 익숙함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야말로 혜성 같은 등장이었다. ‘그대 슬픔까지 사랑해’로 데뷔해 ‘오직 하나뿐인 그대’까지 같이 히트했다. 1991년은 가히 ‘심신의 해’였다. 제6회 골든디스크상 신인가수상, 제2회 서울가요대상 신인상, KBS 가요대상 신인상 및 10대가수상, 이듬해 제3회 서울가요대상 우수상까지. 1990년대 가요계 트로이카는 윤상, 신승훈 그리고 심신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노래가 그만큼 뜨는 일은 복권 당첨보다 확률이 희박하더라고요.(웃음)” 수화기 너머에서 심신은 황금기를 잠시 곱씹는 듯했다. 이어 “인생에 한 번 아니면 두 번밖에 안 오는 기회”라는 기자의 맞장구에 “거기에 연연하기보다 그 커리어를 토대로 보다 업그레이드된 내 음악을 계속 보여드리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심신은 여전히 음악을 노래한다. 그는 현역 가수다. 지난해에는 SBS ‘착한마녀전’ OST ‘올웨이즈(Always)’를 발표했고, 또 영화 ‘신과함께-인과 연’ 삽입곡 ‘돌고 도는 인생’을 리메이크했다. 재즈 발라드곡 ‘쉘 위 댄스(Shall we dance)’도 듣기 좋다. 옛날 악단 사운드가 귀를 끈다. ‘오직 하나뿐인 그대’는 각각 댄스와 록으로 편곡된 버전이 18년 만에 새로 나왔다. “사업이나 다른 일은 일체 하지 않아요. 지금도 녹음실과 무대가 제 집입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관객 분들을 찾아뵙고 있어요. 크고 작은 콘서트가 제 무대죠. 클래식 하는 분들과 함께할 때도 있고 저 혼자 할 때도 있고. 무대는 가리지 않아요.”
최근 그는 대전에 내려가 고등학생 시절 그룹 사운드를 함께한 선배 윤희현 씨를 찾았다. 교내 밴드 버닝 스톤즈(Burning Stones)가 ‘배드 케이스 오브 러빙 유(Bad Case of Loving You)’를 연주하는 모습에 대전상고 1학년 심신은 그가 있어야 할 곳이 무대임을 직감했다. MC 김용만, 윤정수와 함께 약 35년 만에 모교를 찾은 그는 운동장 조회대에 올라 ‘스텀블링 인(Stumblin’ In)’을 부르며 버닝 스톤즈를 처음 만난 그때를 추억했다.
“라디오 노래를 듣고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다섯 살 때 일입니다. 중학생 때는 성악을 배웠고요. 진학 후에는 선배들이 연주하는 생음악과 그 강렬한 사운드에 매료됐죠. ‘저 무대에 서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이 전부였어요.”
음악을 향한 열정만큼은 과거와 똑같다고 자랑하는 심신의 음악적 토대는 록이다. 그는 버닝 스톤즈 시절 가출까지 감행했다. 아버지가 음악 하는 걸 반대해서다. 사실 그가 예술고 대신 상고로 진학한 것 역시 집안의 반대가 이유였다. 반항아 심신은 대천해수욕장에 가 형들과 클럽 밴드로 일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음악하던 때”였다.
“그때는 학교에 실용음악과가 없었어요. 음악을 배우고 싶은데 가곡만 가르쳐주는 시대였고요. 결국 록 음악은 레코드판이 선생님이었어요. 판을 수백 번 듣고 일단 곡을 카피한 후 그 카피 음악으로 실력을 키운 다음에야 자기 개성이 드러났으니까요.” 특히 가수 빌리 조엘의 음악이 아직 기억에 생생하다. “‘유 메이 비 라이트(You May Be Right)’ ‘이츠 스틸 록 앤드 롤 투 미(It’s Still Rock and Roll to Me)’ 같은 노래를 많이 불렀죠.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좋아할 법한 빌보드 음악을 많이 불렀어요. 그러다 지금에 이르렀죠.”
세월이 좋아졌다. 인터넷만 켜면 8090 가수의 그때 그 무대가 연중무휴인 것이다. 갓 데뷔해 ‘오직 하나뿐인 그대’를 부르는 심신을 만나는 감정은 두 가지. 하나는 지금 들어도 노래가 좋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각 같은 외모에 대한 감탄이다. 밴드로 다져진 음악성에 잘생긴 외모까지. 하지만 의외로 데뷔가 늦었다. “대천 조그만 무대에서 시작해 굉장히 잘하는 밴드만 출연하는 명동 나이트클럽 무대에 서게 됐어요. 거기서 공연을 시작하고 ‘걔가 반응도 좋고 음악도 열심히 한대’란 소문이 났죠. 무명에서 유명이 되기까지 시간이 걸렸어요. 음반 제의를 받고 데뷔 앨범을 내기까지 또 시간이 걸렸고요.”
그룹 사운드와 녹음은 달랐다. 그는 “처음에 내가 노래한 걸 스튜디오에서 들어보고 내 목소리 같지 않아 좀 실망이 컸다. 라이브 창법과 녹음실 창법은 다르더라”고 회상했다. 당시 그가 낸 묘안은 공연장에 카세트 덱을 설치하는 것. 약 1시간에 달하는 공연을 매일 차에서 복기했다. 귀에 거슬리는 창법 등을 고치고 나니 데뷔가 눈앞이었다. “록적인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회사에서 상업성을 부탁했어요. 음악은 록뿐이라는 편협함을 가진 건 아니었기에 ‘들어서 좋으면 좋은 음악’이란 생각 아래 1집을 준비했죠.”
그리고 터졌다. 후속곡 ‘오직 하나뿐인 그대’는 1991년 KBS2 ‘가요톱10’ 통산 5주 1위를 차지했고,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에서는 ‘꿈’으로 1위를 달리던 ‘가왕’ 가수 조용필을 꺾고 정상을 차지했다. ‘9주 연속 1위’를 그때 달성했다. 그해 한국갤럽 인기도 조사에서 압도적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특히 ‘오직 하나뿐인 그대’를 부르며 춘 ‘권총 춤’은 가수 박남정이 선보인 ‘ㄱㄴ 춤’과 함께 지금까지 회자되는 그의 시그니처다.
“발라드곡을 부르다 빠른 곡을 부르는 거라 선글라스도 끼고 마이크 스탠드도 잡고 했어요. 강렬해 보이고 싶어서요. 그리고 그 춤은 춤이라고 생각하고 춘 건 아니었어요. 간주 때 뭔가 해야 했거든요. 어깨춤으로 비트를 탔을 뿐이에요. 근데 어떤 기자 분께서 그걸 ‘쌍권총 춤’이라고 기사에 명명하셨더라고요. 그때부터였죠.(웃음)”
밴드 하겠다고 가출한 아들을 찾아 해수욕장까지 간 부모님이 그 성공을 제일 반겼다. 심신은 그 이름 두 자를 비교적 짧은 시기 안에 알린 것을 “행운”으로 기억한다. “물론 거만해질 수도 있었죠. 근데 제가 얻은 것에 비해 제 실력은 거기에 못 미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방랑자처럼 다니기 시작했어요. 세상을 알고 싶었습니다.”
타국 생활은 가수를 살찌웠다. 먼저 1996년 이은혜 씨와 결혼 후 호주에서 약 2년간 음악 공부를 했다. 재즈 바에서 현지 연주자와 연주하며 견문을 넓힌 것이다. “김영, 유태진, 김지훈 세 명을 거기서 만나 4집 앨범 ‘데자뷔(Deja-Vu)’를 준비했어요. 거기 들어 있는 곡이 다 괜찮아요. 학생 밴드 느낌이 나는 순수한 곡들이죠. ‘엔딩(Ending)’이란 록 발라드곡을 개인적으로 좋아해요. 곡들에 그때 제 감정을 솔직히 표현했어요.”
미국 시애틀에서는 재즈와 보컬을 공부했다. 시애틀에서도 음악에 대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 음악 클럽을 순례하며 공연 문화를 배웠고 교회 음악에도 눈을 떴다. 약 400평 규모의 식당을 시내에 내기 위해 계약까지 했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돈 버는 것보다 우선이었다. 스트레스는 그를 한국을 떠나게 했으나, 음악은 그가 다시 한국에 돌아오게 만들었다. 심신은 “시애틀에 가서 무엇보다 그 사람들의 삶, 고민, 꿈, 미래에 대한 준비 등을 유심히 봤다.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를 주목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와서도 사람 보기를 좋아한다. 장 보는 일은 그의 취미 중 하나다. 이유는 사람들 표정 보는 것이 좋아서다. “시내에 나가면 종로를 가곤 해요. 제가 갓 서울 올라왔을 때 본 건물이 그대로 있는 그곳에 가 길을 오가시는 분들의 표정을 보죠.”
세상 구경으로 얻은 감성을 음악에 녹여내는 것에 익숙한 그는 또 굉장한 음악 애호가이기도 하다. 그는 “세상 모든 음악을 지금도 많이 듣고 있다”고 자랑했다. “들으면서 귀로 배우는 거죠. 눈으로 읽어서 배우는 것도 있지만 귀로 들으면서 배우는 것도 있거든요. 귀는 영혼까지 느낄 수 있으니까 들으면 영혼을 배우는 셈이에요.”
동호인끼리 모여 고해상도 음악을 즐겨 듣는다고 밝힌 그는 2007년부터 매년 한두 장씩 음반을 내고 있다. 그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장르적으로 심신의 음악은 계속 발전함에도 불구, 사람들은 그에게 ‘오직 하나뿐인 그대’ 혹은 과거 히트곡만 바란다. 세상은 색안경을 끼고 ‘오직 하나뿐인’ 이미지로만 그를 바라본다. 심신은 “그건 어쩔 수 없는 듯하다”며 웃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과거를 다시 리마인드 하고 싶은 마음이 있잖아요. 거기에 부응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봅니다.”
그는 거듭 “날씨”를 언급했다. 데뷔 초 10대 및 20대에게 아이돌과 비슷한 지위를 누렸다. 현 인기 아이돌에게 무엇을 조언해주고 싶냐는 질문에 심신은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그것을 날씨처럼 불가항력으로 여긴다면 용기를 갖고 정면으로 부딪칠 수 있을 것이라 답했다. 살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냐는 물음에는 “사실 비를 마주한 듯한 어려움이 많았다”며, “사람이 항상 편할 순 없다. 힘들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어떤 가수로 불리고 싶을까. 답은 모두의 친구다. 젊었을 적 신념으로 생을 살아왔다고 말한 그는, 대중이 그를 ‘노래하는 친구’로 친근히 대해주길 바랐다. “요즘은 블루스에 집중하고 있어요. 현대 음악의 뿌리는 흑인 음악이에요. 블루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죠. 나이를 먹을수록 시작을 추구하게 되네요. 30년대 음악이 지금 음악보다 나으면 낫지 못하지 않잖아요. 그 음악을 연구하며 제 마음이 가는 대로 길을 항해하려 합니다.”
(사진제공: 심신, 마로니에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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