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기업들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기득권층의 반발, 관료들의 보신주의, 정치권 포퓰리즘, 규제 등이 승차공유와 원격의료, 인터넷전문은행 사업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혁신성장이 “실종됐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하면서 소득주도성장, 공정경제, 혁신성장 세 가지를 경제정책의 축으로 내세웠다. 이 중 혁신성장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진행되는 게 없다”는 업계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다.
정보기술(IT) 업계를 중심으로 추진 중인 승차공유, 원격의료, 인터넷전문은행이 대표적인 혁신성장 사업이지만 하나같이 발목이 잡혀 있다. 제3호 인터넷전문은행은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관료들의 보신주의 ‘덫’에 걸려 지난 26일 무산됐다.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협의체인 코리아스타트업포럼은 신청 업체 모두 탈락한 것에 대해 27일 강력 반발했다. “이미 간편송금 금융기술로 기반을 닦은 토스가 떨어질 정도면 어떤 스타트업이 인터넷은행에 도전할 수 있겠느냐”고 날을 세웠다.
승차공유와 원격의료는 기존 택시업계 및 의사들의 반발과 정치권의 포퓰리즘에 길을 잃었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해외에선 활발한 모바일 헬스케어 혁신이 한국에서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혁신이 막히다 보니 해외로 떠나는 헬스케어 기업이 계속 늘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재웅 쏘카 대표는 택시업계가 승차공유 서비스 ‘타다’를 불법이라고 검찰에 고발하자 정부를 비판했다. 그는 이달 초 “세금으로 (택시업계 보조금) 1조원을 지급하는데 택시업계 종사자, 국민 아무도 행복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타다를 운영하는 VCNC의 대주주이자 창업자다.
조신 연세대 정보대학원 교수도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타다 논란의 허점을 지적했다. “정작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소비자’가 빠져 있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라고 했다.
카풀도, 인터넷銀도 소비자는 안중에 없다…'4중 덫'에 갇힌 혁신
“이렇게 가다간 한국이 4차 산업혁명에서 낙오될 수도 있습니다.”
승차공유, 원격의료에 이어 제3호 인터넷전문은행까지 정보기술(IT)업계의 대표적 혁신사업이 줄줄이 좌초하자 나오는 우려다. 업계와 전문가들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기존 업계의 반발과 관료 특유의 보신주의, 표만 의식하는 정치권의 포퓰리즘, 신기술을 따라잡지 못하는 각종 규제를 네 가지 ‘덫’으로 지적했다. 이런 덫을 걷어내지 못하면 혁신의 편익을 누려야 하는 소비자가 가장 큰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가로막기까지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이 지난 26일 후보였던 키움뱅크와 토스뱅크 모두에 제3호 인터넷전문은행 예비인가를 내주지 않은 것은 관료들의 보신주의 때문이란 지적이 나온다. 금융당국은 외부평가위원회(외평위)의 반대를 이유로 들었다. 외평위는 키움뱅크는 혁신성, 토스뱅크는 자금력이 부족하다고 불허 배경을 설명했다.
업계의 시각은 다르다. 금융위와 금감원 관료들이 훗날 정책적인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외평위를 핑계 삼았다는 분석이다. 외평위는 자문기구일 뿐 반드시 이들의 의견을 따라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한 핀테크(금융기술) 업체 관계자는 “기업이 리스크를 감내하지 않으면 혁신적인 상품과 서비스가 나올 수 없다”며 “정부도 잘되지 않을 경우의 리스크를 져야 하는데 금융당국은 보장된 결과만을 바라고 있다”고 꼬집었다. 금융당국이 말로만 혁신성장을 외쳐왔다는 얘기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이재웅 쏘카 대표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도 정부가 기업의 혁신활동을 가로막은 예로 꼽힌다. 최 위원장은 22일 기자들과 만나 ‘타다’ 서비스로 택시업계와 갈등을 빚고 있는 이 대표를 “무례하고 이기적이다” “오만하다”는 표현을 쓰며 강하게 비판했다.
업계에선 최 위원장이 금융위 소관 분야도 아닌데 기업가 개인을 공개석상에서 비난한 대목을 문제 삼고 있다. 승차공유 서비스에 대한 정부 내 인식 수준을 고스란히 드러냈다는 지적이다.
‘묵묵부답’ 규제 혁신…좌절하는 스타트업
자산관리 플랫폼 ‘뱅크샐러드’를 운영하는 레이니스트는 반 년째 국회만 바라보고 있다. 하루빨리 고객의 금융 데이터를 분석·관리하는 서비스를 확장해야 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신용정보법 개정안이 통과되지 않고 있다.
뱅크샐러드 관계자는 “지금은 금융회사들이 모든 금융정보를 독점한 상태라 일반 핀테크 기업의 정보 수집에 제약이 따른다”고 토로했다. 그는 “신용정보법 개정안이 이를 해소해줄 것으로 기대하고는 있지만 반 년째 소식이 없어 애만 태우는 중”이라고 말했다.
신용정보법 개정안은 금융·신용 등 각종 데이터 활용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내용 등을 담고 있다. 현재 국회에 계류된 법안만 10여 개다. 하지만 언제 국회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지 미지수다. 정치권이 시민단체 등의 반발을 우려하고 있어서다.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이 법령에 발이 묶이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카카오모빌리티에서 추진 중인 ‘규제혁신형 플랫폼 택시’가 그중 하나다. 카카오모빌리티는 지난 3월 택시업계와 ‘사회적 대타협’을 선포한 뒤 지속적으로 플랫폼 택시 운영안을 논의해왔다.
택시업계와의 협의 과정은 수월한 편이었지만 관련 법령이 없는 게 문제였다. 국토교통부와 서울시도 대타협 이후 손을 놓았다. 급기야 23일 카카오모빌리티와 택시단체가 “플랫폼 택시의 출시를 위한 여건 조성을 강력히 촉구한다”며 이낙연 국무총리,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면담을 요청하고 나섰다.
구태언 테크앤로 변호사는 “정부가 인공지능(AI), 자율주행자동차 시대의 모빌리티 청사진을 제시해야 하는 시점에 아주 기본적인 것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모빌리티(이동수단), 의료, 금융 등 혁신사업에 대한 정부의 청사진이 존재하지 않는 게 큰 문제”라고 주장했다.
일부 기업은 네 가지 덫을 피해 아예 해외에서 신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네덜란드, 동남아시아, 호주 등에서 승차공유 서비스에 투자했다. 네이버는 일본 자회사 라인을 통해 현지 핀테크 시장 진출에 공을 들이고 있다.
송형석/김남영/윤희은/박신영/이지현 기자 clic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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