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주요국들의 파워게임으로 인선에 진통을 겪던 차기 EU 집행위원장으로 ‘7남매 엄마’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독일 국방부 장관이 낙점됐다. 또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로는 프랑스 출신인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내정됐다. EU 행정부 수반과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금융·통화정책을 이끄는 수장 자리를 여성이 차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은 이달 유럽의회 인준을 거쳐 오는 11월부터 임기를 시작한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EU 지도부와 28개 회원국 정상들은 2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EU 정상회의를 열고 차기 EU 지도부 인선을 사실상 마무리 지었다. EU 집행위원장과 ECB 총재 자리를 포함한 EU 5대 핵심 보직 중 네 자리 최종 후보자를 결정했다.
EU를 대외적으로 대표하는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에는 샤를 미셸 벨기에 총리, EU 외교·안보 고위대표에는 호세프 보렐 전 스페인 외교부 장관을 각각 내정했다. 남은 한 자리인 유럽의회 의장은 임기 전반기와 후반기를 유럽 사회당 소속의 이탈리아 정치인 다비드 사솔리와 만프레드 베버 유럽국민당(EPP) 대표가 각각 맡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EU의 가장 중요한 두 자리를 모두 여성이 맡게 된 점이 눈길을 끌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EU 최고 권력기관에서 60년 이상 이어진 남성 주도 문화를 무너뜨리는 사건”이라고 전했다. 도날트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이날 “결국 유럽은 여성(을 선택했다)”이라며 “그런 결과를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밝혔다.
EU 집행위원장 자리에 깜짝 내정된 폰데어라이엔은 독일 최초의 여성 국방부 장관이다. 독일 하노버의대 의학박사 출신으로, 산부인과 의사 및 의대 교수로 일하다가 40대에 독일 집권 기독민주당(CDU) 소속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특히 그는 7명의 자녀를 둔 엄마로 남성 유급 육아휴직 등 정책을 추진했다. EU 공동체 차원에서는 실용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메르켈 내각에서 가족여성청년부 장관, 노동부 장관 등을 지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이날 임시 EU 정상회의를 마치고 “(폰데어라이엔 후보가) 거의 만장일치로 선출됐다”며 “기권표를 던진 한 명은 바로 나”라고 말했다.
10월 말 임기가 끝나는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 후임으로 라가르드 IMF 총재가 낙점된 것도 예상외라는 평가가 많다. 변호사 출신인 라가르드 총재는 중앙은행 출신이 아니고 통화정책 업무를 직접 해본 적이 없다. 라가르드 총재는 프랑스 산업통상부 장관, 재무부 장관 등에 이어 2011년부터 IMF 총재를 맡았다. 그러나 그는 유로존 통화정책을 결정하고 임기가 8년이나 돼 경쟁이 치열했던 ECB 총재 자리를 꿰찼다.
시장에서는 라가르드가 IMF 총재로서 보여준 정치력을 발휘해 ‘조정자’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ECB의 기존 통화정책 기조는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IMF도 그동안 ECB의 확장적 통화정책을 지지해왔기 때문에 추가 경기부양책을 시사한 드라기 총재의 행보를 이어갈 것으로 관측된다.
라가르드 총재는 매년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뽑는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의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글로벌 여성 리더 중 한 명이다. 2011년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당시 IMF 총재의 성폭행 스캔들 이후 위기에 빠진 IMF를 넘겨 받으며 ‘금융계의 록스타’로 평가받았다.
후임 IMF 총재로는 올리 렌 핀란드 중앙은행 총재, 프랑수아 빌루아 드갈로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 옌스 바이트만 독일 분데스방크 총재, 브누아 쾨레 ECB 이사 등이 거론되고 있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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