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행정수반 격인 집행위원장에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전 독일 국방장관이 16일(현지시간) 공식 선출됐다. EU 집행위원장에 여성이 오르기는 처음이다. 폰데어라이엔 차기 집행위원장은 저출산 국가 독일에서 무려 일곱 자녀(2남5녀)를 기르며 유리천장을 깨고 ‘유럽 정상’ 자리에 올랐다는 점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브렉시트·미국과의 갈등 해소는 과제
이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유럽의회 본회의에서 폰데어라이엔 차기 위원장은 재적의원 747명 중 절반이 넘는 383명의 찬성표를 얻어 인준을 통과했다. EU 집행위원장은 5년 임기로 폰데어라이엔은 11월 1일 장클로드 융커 현 위원장으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아 2024년 10월 말까지 이 자리를 책임진다. 폰데어라이엔 차기 위원장은 “단합되고 강한 EU를 만들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폰데어라이엔 차기 위원장은 당장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문제를 비롯해 미국과의 무역갈등 해소, 기후변화 등 현안을 떠안게 됐다. 특히 취임 하루 전인 10월 31일은 영국의 EU 탈퇴 시한이다. 영국이 아무런 합의 없이 EU를 떠나는 ‘노딜 브렉시트’를 선택할 경우 EU에 상당한 혼란이 닥칠 수도 있다. 폰데어라이엔 차기 위원장은 앞서 “필요하다면 영국의 브렉시트 추가 연기를 지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EU 최대 이슈 중 하나인 기후변화 대응과 관련해서는 2050년까지 유럽에서 자동차 배기가스 배출을 ‘제로(0)’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내놓기도 했다. 폰데어라이엔 차기 위원장은 “EU에서 법치와 민주주의 원칙을 강화해나가겠다”고 말했다. 미국과는 에어버스 보조금, 자동차 관세, 철강 관세 등과 관련한 갈등을 해소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 선출은 EU 2강인 독일과 프랑스가 타협을 이룬 결과로 풀이된다. 독일인 집행위원장을 바란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지원에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여성 위원장’이라는 점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지지까지 얻어냈다.
독일 기독민주당의 ‘개혁파’
폰데어라이엔 차기 위원장은 7남매의 엄마이면서 의사 출신으로 국방부 장관에 임명돼 이름을 알렸다. 그는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독일에서 육아와 일 모두 성공을 거둬 유럽 중산층 여성들의 ‘롤모델’로 꼽히기도 한다. 독일에선 여성이 둘째 아이를 낳고 다시 직장에 돌아오는 비율이 5% 안팎에 불과하다. 독일 정계에서도 ‘저출산 파이터’로 통한다. 노동부 장관 시절 당내 반발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2개월 육아휴직 제도 등을 밀어붙였다.
그가 의사의 길을 걸으면서도 출산·육아와 사회활동을 병행할 수 있었던 데는 같은 의사이자 기업인인 남편 하이코 폰데어라이엔의 도움이 있었다. 폰데어라이엔 차기 위원장은 과거 인터뷰에서 “육아는 대부분 남편이 맡는다”며 “더 많은 남성이 내 남편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정치에 뛰어든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의 아버지는 EU 집행위원회 관료, 독일 니더작센주(州) 총리를 지냈다. 폰데어라이엔 차기 위원장을 독일 중앙정치 무대로 발탁한 사람은 메르켈 총리다. 그는 메르켈 정부에서 가족여성청년부, 노동부 장관을 지낸 뒤 독일 첫 여성 국방부 장관을 맡아왔다.
소속 정당인 독일 기독민주당(CDU)에선 ‘개혁파’로 꼽히기도 한다. 기업 임원에 대한 여성할당제 도입, 직장 여성을 위한 보육시설 증대, 최저임금제 도입, 동성 결혼 등에 찬성 입장을 보였다.
‘EU 빅5’ 자리 중 하나인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로 내정된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이날 IMF에 공식 사직서를 제출했다. 라가르드 총재도 유럽의회 인준을 받으면 ECB 최초의 여성 수장이 된다. 차기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EU 외교·안보 고위 대표로는 각각 샤를 미셸 벨기에 총리, 호세프 보렐 전 스페인 외교장관이 내정됐다. 폰데어라이엔 차기 위원장이 EU로 이동하면서 공석이 된 독일 국방장관엔 여성인 아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워 기독민주당 대표가 내정됐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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