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재 기자] 24일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가 개봉했다. 개봉 후 첫 주말 맞이. 관객들의 선택으로 ‘나랏말싸미’는? 물론, 결말 ‘스포’는 없다.
★★★☆☆(3.3/5)
‘나랏말싸미’는 훈민정음 언해본 어제(御製) 서문 중 일부를 제목으로 차용함으로써 본작이 한글 창제를 다루는 작품임을 시작부터 강조한다. ①조선 제4대 임금 세종이 단독으로 한글을 창제했든, ②그가 정인지(최덕문) 등 집현전 학자들과 공동으로 그것을 만들었든, 일부 주장대로 ③승려 신미(박해일)가 범어(산스크리트어) 등을 토대로 새 문자를 만들었든, 관객이 ‘나랏말싸미’에 바라는 바는 훈민정음 탄생까지의 극적 묘사일 터. 하지만 이 영화에는 자극이 거의 없다. 관조적 자세로 110분을 잔잔히 전진할 뿐이다.
고요한 그 정적을 깨는 천둥은 배우 고(故) 전미선과 그가 맡은 소헌왕후 역의 평행 이론으로, 영화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임을 ‘나랏말싸미’는 일깨운다.
요즘 세종(송강호)은 고민이 깊다. 그가 쓴 책이 세상에 전달되지 않아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책을 써도 까막눈 백성은 그 책을 읽지 못한다. 여태껏 써온 책을 “쓰레기”라 부르는 세종. 중국의 온갖 문서를 훑어 봤지만 배우기 쉬운 문자를 만드는 일은 요원할 뿐이다. 소갈증(당뇨병) 탓에 술은 독이고 어의는 시력을 과도하게 쓰면 왼쪽 눈마저 실명할 수 있다고 아우성이다. 왕비 소헌(전미선)의 주선으로 신미를 만난 세종은 각종 언어에 능통한 그에게 문자 창제에 힘을 보태줄 것을 부탁한다. 이에 신미는 그 조건으로 숭유억불(崇儒抑佛)은 개나 주라는 듯 사대문 안에 절을 지어 줄 것을 요구하는데….
진위 구분은 역사 재구성의 관례 중 하나. 허나 이번만큼은 그 일이 무상무념으로 다가온다. 혹자에게는 전가보도로 느껴질 수 있으나, 이미 조철현 감독은 ‘훈민정음의 다양한 창제설 가운데 하나를 영화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란 자막을 작품 서두에 배치시켰고 이로써 ‘나랏말싸미’를 향한 실제 역사와 다르지 않냐는 비판은 무위로 돌아간다.
세종대왕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라고? 물론 창제 원리와 사용법 등 한글의 구체적 개발은 신미의 공(功)으로 소개되나, 불순한 의도 아래 세종을 그 창제에서 배제시키는 일 따위는 감지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세종은 시쳇말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다. 총괄자인 그에게는 인류에게 불을 나누어준 프로메테우스에 버금가는 애민 정신이 있다. 당뇨, 류마티스, 준(準) 실명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새 문자로 지식의 독점을 깨야 한다고 하는 세종을 보면 누가 한글을 만들었냐는 빗나간 논쟁이다.
본작에서 송강호의 세종은 매우 ‘송강호’스러워서 갑자기 “신미야 넌 계획이 다 있구나”를 말할 듯한데, 그 세종이 카리스마를 갖는 유일한 순간은 황제의 나라를 능가하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며 “모든 백성이 문자를 읽고 쓰는 나라”를 언급하는 때다. 문(文)으로 부국강병을 꿈꾼 그에게 경배를 올리기에 ‘나랏말싸미’는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다.
그래서 훈민정음이 배포되기까지를 지켜보는 일은 세종과 신미의 존재로 말미암아 그 흥미가 배가된다. 세종이 한글 창제에 있어 글(한자)을 읽고 쓰는 지식층을 장애물로 상정하는 점은 훈민정음 배포 이래 약 573년이 흘렀음에도 그 매개가 달라졌을 뿐 방해 주체는 여전히 건재함을 떠올리게 하며, 유교는 숭상하고 불교는 억누르는 나라 조선에서 왕과 승려가 오직 ‘한글’ 때문에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일은 그 자체로 극적이다. 어금니 소리를 탐구하기 위해 입속에 손가락을 넣고 어금니에 무슨 움직임이 있냐고 묻는 것을 보면 어쩌면 문자를 만드는 일이 꽤 원초적인 접근에서 시작했을지 모른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수학과 기하학을 바탕으로 “새 문자는 점과 직선으로만 만든다”는 세종에게선, 그가 기술 개발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과학에도 뛰어난 지도자였음을 기억나게 한다.
그럼에도 ‘용비어천가’에 그치면 안 될 작품이기도 하다. 주조역 총 11명(세종, 신미, 소헌왕후, 왕세자, 수양, 안평, 학조, 학열, 진아, 정인지, 고약해) 가운데 암전이 끝난 후에도 기억에 남는 인물은 세종, 신미, 소헌왕후 3인이 전부다. 나머지가 얼마나 도식적으로 운용되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나같이 종이 인형처럼 나풀거릴 뿐이다.
세종과 신미가 서로의 프로타고니스트이자 안타고니스트로 작용한 것 역시 패착이다. “갈등이 외부에 기인하는 것보다 내부에서 출발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고 한 조철현 감독의 말대로 ‘나랏말싸미’는 한글 탄생의 위기를 사대부의 실질적 위협에서 찾지 않는다. “너희는 너희의 일을 해라. 나는 나의 일을 하겠다”는 세종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작은 안타고니스트일 뿐이다. 위협은 되나 큰 방해는 안 된다는 말이다.
결국 ‘어? 이러다 한글 못 만드는 거 아니야?’라는 긴장감을 조성하는 일은 신미의 몫이다. 그러나 감독은 그 둘을 협력자면서 경쟁자인 역설에 두는 것만 구상했을 뿐 그 갈등 구조를 어떻게 구현해야겠다는 고민은 상대적으로 덜한 듯 보인다. 왕조에 의해 가족에 이어 새 보금자리인 사찰마저 박살난 신미가, 조선을 불국(佛國)으로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을지언정, 세종에게 창제 건으로 갑론을박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불만도 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공자와 부처의 대립은 절정은커녕 전희마저 실패했다.
이 영화의 실(實) 주인공은 세종도, 신미도, 훈민정음도 아닌 소헌왕후다. 소헌왕후는 외척을 경계한 시아버지 태종에 의해 집안이 풍비박산 난 인물. 아버지는 처형 당했고 어머니와 친족은 관노가 되고 만다. 조선의 왕비인 그가 불교에 매진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극 중 소헌왕후는 내명부 통솔로 한글의 창제 및 배포에 직간접적 영향을 끼치고, 이에 그 유지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신미는 불교적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백성들은 더이상 당신을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소헌왕후가 신미를 다시 궁으로 부르라는 뜻으로 세종에게 한 말이다. 전미선이 직접 지은 대사로,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한 배우의 결과 소헌왕후의 후세 평가가 동시에 녹아든 점이 눈길을 끈다. 15일 열린 언론시사회에서 송강호는 “이 영화의 슬픈 운명”이라며 평행 이론을 언급한 뒤, “그것이 이 영화가 관객 분들께 슬픈 영화가 아니라 그 슬픔을 딛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을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배우는 떠났으나 그가 연기한 등장인물과 작품은 온전히 남았다. 그 평행 이론이 ‘나랏말싸미’의 강점으로 남은 것은 애석한 일이나, 흥행 여부를 떠나 전미선은 오승현 대표의 바람대로 “최고 배우”로 오래도록 기록될 터이다.
분명 한글, 세종, 송강호가 돋보여야 할 작품인데, 보고 나면 전미선밖에 생각이 안 난다. 극 중 신미는 복숭아 이야기를 꺼낸다. 그 씨앗 안에 얼마나 많은 복숭아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그는 말한다. 영화도 그렇다. 무엇을 얻어 가야 할지가 빤히 보이는데도 관객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기연 탓에 전미선만을 기억하고 극장 문을 나선다. 때로는 뱀처럼 음흉하게, 때로는 바위처럼 묵직하게, 때로는 사자처럼 용맹하게, 이 가운데 한여름에 개봉한 ‘나랏말싸미’는 겨울비처럼 아련하게 한 사람을 추억하게 만든다.
흥행 논리로 따질 수 없는, 영화의 묘미다.
(사진제공: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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