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살찐 정부, 가난한 국민

입력 2019-08-20 17:50   수정 2019-08-21 00:10

내년 정부 예산이 510조원을 넘는 초(超)슈퍼예산이 될 모양이다. 여당이 530조원까지 늘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하니 현 정부 3년 만에 이전 정권 8년간 늘어난 액수와 맞먹는 예산 증액이 이뤄질 가능성이 커졌다. 각각 2% 수준의 경제 성장률, 물가 상승률 유지도 불확실한 마당에 예산이 두 자릿수로 증가하면서 정부 몸집만 급속히 불어나는 모양새다.

그러나 조세 수입을 늘리는 것은 여의치 않을 전망이다. 가계의 근로소득 증가율은 0%대로 떨어졌고 수출은 7개월째 줄고 있다. 경기 부진이 5개월째 이어졌다는 진단도 나왔다. 작년 기업의 40%가 한 푼도 남기지 못했고 10대 그룹 상장 계열사의 올 상반기 이익은 작년보다 54%나 줄었다. 한·일 관계 악화로 인한 경제활동 위축도 진행 중이다. 경제가 활성화돼 세금이 더 걷힐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말이다. 세율을 올릴 여지도 별로 없다. 큰 폭의 재정적자를 일으키고, 민간에서 돈을 꿔서 메우는 수밖에 없다.

정부 지출을 늘리는 이유로는 경기 대응과 혁신성장 뒷받침이 언급된다. 그러나 경기 대응을 위한다는 말 자체가 지금껏 정책 책임자들이 ‘소주성(소득주도성장)’을 강력 추진하며 “경제는 튼튼하다. 기다리면 정책 효과가 나타나 더 좋아질 것”이라 말해온 것을 생각하면 생뚱맞은 감이 있다.

혁신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라는 얘기도 빈말처럼 들린다. 2017년 401조원이던 한 해 예산이 2년간 69조원 증가했지만, 혁신성장 기반 조성을 위한 사회간접자본(SOC), 연구개발(R&D) 예산은 거의 늘지 않았다. 대신 보건·복지·고용 및 일자리 예산 증가가 38조원에 달했다. 내년 예산 증가의 대부분도 지금까지처럼 복지, 공무원 증원을 포함하는 일자리 용도일 개연성이 크다.

정부는 소득격차 해소, 생활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의 생계 지원 등을 위한 복지 지출을 한다. 그러나 한국에는 이를 넘어 청년수당, 일률적인 대학등록금 지원, 농민수당 등의 현금 살포성 복지 지출이 넘쳐나고 있다. 잘못된 또는 과다한 복지 지출은 노동윤리를 파괴한다. 국민을 복지 중독에 빠지게 함으로써 삶을 국가에 저당잡힌 노예적 인간으로 만든다. 더 많은 현금 살포를 약속하는 포퓰리즘 정책 경쟁을 일으켜 국가를 쇠락으로 이끌 가능성도 높인다.

고용 및 일자리 예산은 현 정부 출범 이후 지금껏 70조원 넘게 쓰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현재 고용상황은 처참하다. 금융위기 이후 최고의 실업률, 역대 최대의 구직단념자 수, 사상 최대의 구직급여 지급 등 뉴스가 이어진다. 풀타임으로 환산한 근로자 수가 전년 대비 20만 명 줄었다는 분석도 있다. 엄청난 고용 예산을 쓰지만 상당 부분이 노인을 대상으로 한 아르바이트 자리 등 ‘가짜’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쓰이니 상황이 개선될 리 없다. 내년도 일자리 예산 증가가 고용상황 개선으로 이어질 가능성 역시 거의 없다.

고용 문제의 해소는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주 52시간제 시행, 비정규직 제로(0) 정책 등 소주성 간판을 달고 밀어붙인 반(反)시장적 정책을 폐기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과도한 규제를 완화하는 것은 물론 노동개혁도 필수적이다. 일시적인 경기 후퇴로 생긴 문제가 아닌 만큼 재정지출 증대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대외환경 악화로 긴박한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는 지금, 오히려 필요한 것은 재정 여력을 비축하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정부 지출의 확대는 그것이 조세 증대를 통해 이뤄질 경우 성공적인 경제활동을 한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페널티를 늘려 민간의 경제활동을 위축시킨다. 지출 증대가 재정적자를 통해 이뤄지면 민간 투자를 위축시키는 ‘구축 효과’가 발생한다. 재정적자가 현세대가 갚을 수준을 넘어서면, 그렇지 않아도 수가 줄고 있는 미래 세대가 갚아야 할 빚으로 쌓이게 된다. 후세대를 약탈해 궁핍화하는 행위다.

재정 지출을 급격히 늘리는 정책이 경제의 건전성을 해칠까 걱정된다. 정부는 살찌고 국민은 가난해지는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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