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돈이 금 아니라 ‘은’이었던 이유
서아시아에서는 은조각(은덩이)을, 황허강 중류 지역에서는 별보배고둥 껍데기를 화폐로 사용했다. 그런데 어째서 은덩이와 별보배고둥 껍데기가 화폐로 선택된 것일까?
금속을 뜻하는 ‘메탈(metal)’은 그리스어의 ‘메탈론(mtallon)’에서 파생한 말이나, 본래 ‘달’을 의미했다고 한다. 서아시아에서 ‘달’은 차고 이지러짐에 따라 ‘시간’의 경과를 알려주는 신비한 존재이자 영원성의 상징이었고, 사람들은 금속 중에서 은을 달과 가장 가깝다고 여겼다. 이렇게 은덩이는 외양과 희소성이 ‘가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냈고, 점차 교환 시에 물품의 ‘교환증’으로서 물품순환을 관장하게 되었다.
한편 동아시아에서는 남중국해에 서식하는 자그마한 별보배고둥 껍데기가 화폐의 역할을 했다. 별보배고둥 껍데기는 여성의 생식기와 출산을 떠오르게 하는 까닭에, 대가족이 중심이 되어 조를 재배했던 황허 문명에서는 일족의 번영, 재화 축적, 풍요를 상징하는 행운의 물품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유라시아의 동서를 막론하고, 화폐의 역할을 하는 물품에는 사람들이 납득될 만큼 충분한 종교성, 신비성, 주술력이 필요했다.
값싼 동전을 대량 발행해 주도권을 잡은 시황제
황허강 유역에서는 처음에 조개껍데기를 화폐로 사용했지만, 기원전 221년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에는 조개껍데기 화폐의 계보를 이어받은 값싼 동전이 대량으로 주조되어 통화로 쓰였다. 광활한 중국에서는 위조 화폐를 방지하기가 어려웠던 탓에, 값싼 동전을 대량으로 발행하는 편이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신의 대리인을 자칭한 시황제는 문자, 도량형, 차축의 폭등을 통일하면서 화폐까지 통일해 통화를 황제의 지배하에 놓으려 했다. 진나라의 통화는 원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반량전(半兩錢, 1냥이라는 무게의 반)’이라는 무게를 나타내는 동전(동화)으로, 황제의 명령에 의해 발행되었다. 하늘에 있는 신의 대리인(천자)인 시황제가 제국 경제의 총괄자로서 권력을 휘둘렀던 것이다. 단, 진나라는 그 역사가 지극히 짧은 데다 광활한 지역을 지배한 탓에, 예부터 각지에 유통되었던 화폐 또한 여전히 사용되었다.
중국 화폐의 기본 특색은 뛰어난 주조 기술을 사용해 값싼 동전을 대량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민중의 생활 깊숙한 곳까지 화폐가 침투한 덕분에, 국가가 직접 백성을 지배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 은화에 은 함유량 줄여 ‘자멸’
화폐는 제국이 통치를 강화하는 데도 기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몰락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1세기 말 로마 제국의 정복 활동은 일단락되지만, 시민권을 가진 몰락한 병사의 자손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 지출이 불가피했다. 오늘날로 치면 사회보장비가 불어난 셈이다. 하지만 원정을 멈춰 전리품이 끊긴 데다, 기원전 167년에 접수한 마케도니아의 은 광산에 매장된 은이 고갈되자 돈을 지급하기가 어려워졌고, 만성적인 재정난이 이어졌다.
이런 까닭에 로마 제국은 주화 공급량을 늘리려 은 함유량을 줄였고, 그 바람에 주화의 질은 점점 더 떨어졌다. 로마의 첫 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us)가 발행한 은화와 비교해보면, 제국의 영토가 최대로 확장되었던 트라야누스(Trajanus) 황제 때는 15% 감소, 공중목욕탕을 만든 일로 유명한 카라칼라(Caracalla) 황제 때는 50% 감소하는 식으로, 은의 함유량을 순차적으로 줄여나갔다. 처음에는 순은에 가까웠던 로마의 은화는 3세기 말이 되자 은 함유량이 고작 5%밖에 되지 않는 주화로 변함으로써, 화폐 가치가 하락해 갖가지 물가가 상승했고, 로마의 경제적 힘이 무너지면서 정치적으로도 분열되어갔다. 결국 로마 제국은 극심한 인플레이션 때문에 자멸한 셈이었다.
글 싣는 순서
①화폐의 탄생과 제국의 역사
②대항해 시대와 돈의 흐름
③동전 시대에서 지폐 시대로
④달러, 세계 돈 기준이 되다
⑤통화가 움직이는 세상
김은찬 한경BP 에디터 k_eunc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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