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 년간 논문을 써온 학자로서 말하자면, 학술지 논문의 제1 저자는 논문의 콘텐츠에 질적·양적으로 가장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도교수의 지도를 받아 대학원생이 썼을 때도 통상 지도교수는 제1 저자가 아니라 교신저자로 만족한다. 제1 저자는 박사 인력이나 교수들 사이에서도 서로 차지하려고 신경전을 벌인다. 나머지 저자들보다 실적 점수 인정이 때로는 두 배 이상 많기 때문이다. 어떤 교수 임용에서는 제1 저자 논문 수가 결정적이기도 하다. 서로 제1 저자가 되고자 수개월 혹은 수년씩 밤샘 작업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다. 제1 저자는 단순한 실험 테크니션 수준이 아니라 연구 전반을 꿰뚫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고등학생은커녕 서울대 학부생에게도 어렵다. 박사나 교수조차 2주일 기여로 제1 저자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일각에서는 조 후보자 딸이 기여한 부분이 영어 작성이라고 한다. 영국 옥스퍼드대 영문과 출신에게 논문을 보여줬다. 영어 원어민이 번역할 종류가 아니란다. 서울대에서 영어강의를 하고 영어논문을 써왔던 필자의 눈으로 봐도 이건 일반 원어민 영어가 아니다. 일반 원어민은 이런 전문용어를 쓰지 않는다. 게다가 한글 논문의 영어 번역·윤문이 30만~40만원이면 가능한 서비스 업체들이 보편화돼 있다. 그렇다고 번역업체를 저자로 넣는 논문은 없다. 조 후보자 딸이 영어 윤문을 했다고 하는데, 윤문이나 번역업체 수준의 기여로 제1 저자가 된 예는 세계적으로도 전무후무하다.
이재정 경기교육감의 글은 더욱 충격적이다. 그는 “조국 후보자의 따님이 ‘에세이’ 제1 저자가 된 것이 무슨 문제냐”고 했다. 이 교육감은 에세이와 논문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조 후보자 딸의 논문은 에세이가 아니다. 고교생들이 스펙용으로 많이 쓴다는 소논문도 아니다. 이건 의학박사들이, 교수들이 정식으로 쓰는 학술지 논문이다.
일각에서는 기득권층 자녀들을 전수조사하면 비슷한 사례가 수없이 드러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득권층 자녀들을 전수조사해도, 특목고생이나 유학파들이 방학 때 인턴을 하거나 소논문을 쓴 경우는 있겠지만, 전문 학술지 논문에 제1 저자로 이름을 올린 예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번 사례는 그만큼 비상식적이다.
이번 사태로 인해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을 폐지하고 수능 정시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고 민주주의를 폐지하자는 주장 같은 논리의 비약이다. 제도의 미흡과 개인의 비리는 구분해야 한다. 학종의 공정성에 대한 문제 제기에는 공감하지만 그렇다고 수능 정시가 답이 될 수는 없다. 내 생각이 아닌 남의 생각을 정답이라고 맞히는 시험은 어차피 지적(知的)으로 정직하지 않다.
국제 공인 교육과정인 인터내셔널 바칼로레아(IB)에서는 지적 정직성을 최우선으로 친다. 남의 아이디어를 내 것인 양 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한다. 학교 과제조차 인터넷을 보고 짜깁기를 했을까봐 매번 표절검사 시스템을 거친다. 전과목 만점을 받는 최우수 학생도 참고문헌 하나 달지 않았다고 디플로마(IB 졸업증)를 박탈한 사례도 있다. 한영외고 유학반이었던 조 후보자 딸이 경기외고 국제반에서 운영하는 IB를 했다면, 대학 부정 입학에 앞서 고등학교 졸업장 격인 디플로마부터 박탈됐을 것이다.
“불법이 아니다” “당시 제도는 그랬다”고 변명하지 말자. 10년 전이었어도 이건 비상식적이다. 이런 비상식이 정치적 이유로 덮인다면 세계는 한국의 학술계와 교육계를 얕잡아 볼 것이다. 정치와 무관하게 학술계와 교육계가 분노하는 이유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