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제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순식간에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됐다. 그런데 전쟁의 직접적 원인인 대공의 암살에는 우연적 요소가 있다.
당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6년 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보스니아를 빼앗아 병합한 데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대공은 암살음모가 있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방문을 감행했다. 방문 중 청년들이 폭탄을 던졌으나 빗나갔고 암살 용의자들은 경찰에 체포됐다. 프린치프가 테러에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대공의 무개차(無蓋車)가 나타난 것. 길을 잘못 든 운전기사가 차를 돌리려고 애쓰는 사이에 그가 다가가 대공 부부를 총으로 쐈다. 이 암살이 없었다면 제1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역사는 우연과 필연의 열매
사후 가정은 역사의 유용한 도구다. 가정적 접근은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고 역사의 흐름을 읽는 혜안을 길러준다. 그러나 사후 가정에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기존의 역사체계는 설 땅을 잃게 된다. 사후 가정으로 역사를 판단할 때는 당시의 시대정신과 가능한 대안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역사에서 우연적 요소를 부인할 수는 없다. 베를린 장벽을 예로 들어보자. 1989년 11월 9일 장벽붕괴는 동독 공산당 대변인의 말실수에서 촉발됐다. 그는 언제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지금 당장.” 소식을 들은 수천 명의 동베를린 주민들이 검문소로 몰려들자 동독 정부는 국경을 개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역사적 사건에도 ‘만약에’로 시작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만약에 멕시코 원주민들이 단결해 에르난 코르테스와 600여 명의 침략자에게 대항했다면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만약에 히틀러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참호에서 죽었다면?” “만약에 처칠이 1931년 뉴욕 5번가에서 차에 치였을 때 치명상을 입었다면?”
그러나 역사를 우연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클레오파트라와 페르디난트 대공의 사례를 다시 보자. 연구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대단한 미인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들은 그가 탁월한 지성과 언어 구사력으로 상대방을 사로잡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당시 그의 지상과제는 로마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고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미모보다는 자신의 장점을 활용해 ‘로마로 로마를 공략’하는 전략을 집요하게 구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마찬가지로 1차 세계대전이 대공의 암살로 촉발된 것은 맞다. 그러나 전쟁 원인으로 여러 가지가 거론된다. 해외식민지 쟁탈전에서 뒤진 신흥강국 독일과 기존 식민제국인 영국·프랑스의 대립, 민족주의(범게르만주의 대 범슬라브주의), 복합적 동맹관계, 경제적 경쟁, 군비경쟁 등. 빈 체제를 둘러싼 유럽 강대국 간 갈등과 대립이 암살사건을 매개로 연쇄반응을 일으키면서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된 것은 아닐까.
우연을 기회로 만들 수 있어야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우연과 필연의 열매다.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말이다. 이는 국제관계에도 적용된다. 우연처럼 보이는 역사적 사실도 인과관계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 또 역사적 사실의 저변에 있는 힘과 흐름을 무시할 경우 역사로부터 통찰력을 얻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에드워드 카가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적 우연을 강조하는 견해를 부정하면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란 말이 있다. 노력 없이는 운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원래의 뜻이다. 국운(國運)도 마찬가지다. 우연을 기회로 만들고, 기회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노력과 준비가 필요하다. 최근 동북아의 안보지형에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증대하고 있다. 대내외 경제환경도 녹록지 않다. 모든 가능성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행운의 여신은 준비된 사람과 국가에 미소 짓는 법이다.
박희권 < 글로벌리스트·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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