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폐허 속에서 희망의 실 꿰어
6·25전쟁 후 폐허로 변해버린 경기 수원의 한 직물공장 터. 폭탄을 맞은 두 개 공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직원들이 먹고 자던 기숙사 건물도 반쯤은 무너져내렸다. 바로 그곳에서 SK네트웍스의 역사가 시작됐다. 18세 나이에 이 공장에 입사해 생산부장까지 지낸 고(故) 최종건 SK그룹 창업회장은 “건물을 복원하고 과거보다 더 큰 공장을 세우겠다”는 그림을 마음속에 그렸다.
전쟁 후 일자리가 없어진 지역 주민에게 함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고, 당시 국민 생존에 직결되는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직물사업에 도전장을 던졌다. 최 창업회장과 동료들은 잿더미 속에서 쓸 만한 부품을 골라 구부러진 것은 펴고 끊어진 것은 이어가며 4대의 직기를 재조립했다. 여기에 16대의 직기를 추가로 조립해 총 20대의 직기를 가까스로 마련했다. 1953년 봄, ‘조선에서 크게 빛난다’는 뜻을 지닌 기업인 ‘선경직물(현 SK네트웍스)’은 그렇게 태어났다.
SK네트웍스가 창업 초기부터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품질이었다. 섬세한 열처리 과정을 통해 ‘지누시(직물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미리 한 번 빨아 다림질하는 것)’ 없이 바로 재단할 수 있는 ‘닭표 안감’을 선보여 동대문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닭표 안감은 1955년 ‘해방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이후 닭표 안감은 전국적인 브랜드가 됐다. SK네트웍스는 이후 디자인과 품질을 갖춘 봉황새 이불감, 곰보 나일론, 크레퐁, 깔깔이 등을 연속적으로 시장에 선보이며 공전의 히트를 이어갔다. 당시 창업회장과 직원들은 술자리에 함께한 손님에게 “셔츠의 일부분을 잘라도 되느냐”고 묻거나, 시선을 끄는 은행원의 치마를 열 배 넘는 가격으로 구입해 원단을 연구하곤 했다. 수많은 실험 속 시행착오를 통해 나일론 원사를 만드는 최적 조건을 찾고 선진국에 버금가는 가연사(假撚絲)를 생산해낸 열정과 끈기가 이 같은 연속 히트물 제조의 밑거름이었다.
○한국 직물 수출 시장 열어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는 직물업계를 비롯한 한국 산업의 불황기였다. 1959년 6월 정부의 대외 통상 중단 조치로 당시 직물업체들의 원사 수입이 막히게 됐다. 같은해 9월엔 예상치 못한 태풍 사라호가 덮쳐 하룻밤에 사망자 529명과 실종자 304명 등 25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기도 했다. 3년간 이어진 흉년으로 내수시장이 얼어붙었고 정치적 혼란까지 가중돼온 산업계가 어려움을 겪었다.
정부는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즈음 SK네트웍스는 직물 수출을 타진하며 정부와 함께 위기 극복에 나섰다. 하지만 당시 대기업 계열의 직물회사들도 못한 수출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부 무역상은 SK네트웍스의 직물 안감에 일본산을 의미하는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을 붙이라고 권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홍콩 무역회사 등에 ‘닭표 안감’ 견본품을 보내며 노력을 지속한 결과 1962년 4월 홍콩 광홍공사와 거래를 트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한국은 직물 수출국으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도전적인 결단은 성공적이었다. 현지의 호평을 바탕으로 SK네트웍스는 다음해 전년보다 37배 넘는 42만6000달러의 ‘밑지지 않는’ 수출계약을 따냈다. SK네트웍스는 1963년 ‘제18회 광복절 기념식’에서 한국의 첫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시대에 맞는 새 사업 활로 개척
1960년대 들어 직물공장의 한계를 느낀 SK네트웍스는 원사공장에서 봉제공장에 이르는 수직적 다각경영을 구상했다. 1966년 ‘선경 5개년 계획’의 골자다. 자금 조달 및 기술 이전 등 난관을 극복하고 1969년 폴리에스테르 원사와 아세테이트 인견사를 동시에 생산함으로써 국내 1위 원사 업체에 올랐다. 한국 최초 섬유기업집단으로의 도약이었다. 이후 1972년 ‘석유에서 섬유까지’ 계획으로 이어졌다. 외부 환경의 제약 없이 원료부터 제품에 이르는 전 공정을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체제를 갖추자는 구상이었다.
1973년 창립 20년을 맞은 해에 워커힐호텔을 인수한 SK네트웍스는 제품 제조를 넘어 ‘서비스’를 통한 고객과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이로써 한국 관광산업 육성이란 역할을 맡게 됐다. SK네트웍스는 워커힐을 통해 중국 등 외국인 관광객 유치 및 서울 동북권 관광 발전을 이끌었다.
나아가 SK네트웍스는 1970년대 국가의 수출 주도 정책에 맞춰 뉴욕과 런던, 시드니 등지에 지사를 개설하며 해외 거래를 확대했다. 1976년 (주)선경으로 사명을 변경해 한국 수공업 제품을 비롯한 각종 생산물을 수출하는 종합무역상사로 변신했다. 그해 수출 1억불탑을 수상한 데 이어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국가 수출 산업과 발걸음을 함께해왔다.
2003년에는 생산자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바뀌는 산업 트렌드에 주목해 기존 상사와 더불어 정보통신과 석유 판매를 주력으로 하는 고객 중심의 글로벌 마케팅 컴퍼니 ‘SK네트웍스’ 시대를 열었다.
수원의 직물회사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위기도 없지 않았다. 위험이 함께하는 시기마다 패기로 맞서는 한편 생존을 위해 뼈를 깎는 구조조정도 이뤄졌다. 2016년 이후부터는 미래 변화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큰 폭의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을 했다. 사업권 특허 재승인에 실패한 면세사업은 접었다. 그룹의 뿌리로 오랫동안 상징적 의미를 지녔던 패션사업도 매각했다. 더불어 액화석유가스(LPG) 사업을 SK가스에, 석유 도매 사업을 SK에너지에 양도하며 새로운 부활을 준비했다.
김보형 기자 kph21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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