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개혁을 논의한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사실상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연금개혁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내세운 정부가 21개월에 걸쳐 시간만 낭비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경사노위 산하 ‘국민연금개혁과 노후소득보장 특별위원회’는 30일 전체회의를 열었지만 합의안을 마련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대신 세 개 안을 병렬해 정부와 국회에 권고하는 내용의 결과보고서를 채택했다. 현행 40%인 소득대체율을 45%로 올리고, 9%인 보험료율은 10년에 걸쳐 12%까지 올리는 안이 첫 번째다. 두 번째는 현행 제도를 유지하는 안이다. 세 번째는 소득대체율을 유지하면서 보험료율만 즉시 10%로 올리는 안이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과 대한은퇴자협회 등 노조 및 시민단체는 첫 번째 안을 지지했다. 내야 할 보험료율은 3%포인트 늘어나지만 받을 수 있는 연금의 소득대체율은 5%포인트 올라가 가입자의 이득이 크다고 봤기 때문이다. 경사노위 측은 “가장 많은 특위 참석자가 지지했지만 사회적 합의에서 다수안은 큰 의미가 없다”며 “단일안을 내지 못해 송구하다”고 밝혔다. 한국경영자총협회와 대한상공회의소는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기업과 자영업자들이 연금 보험료율 인상을 감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원안 유지를 주장했다. 소상공인연합회는 “국민연금 보험료를 추가로 많이 부담하기는 힘들지만 다음 세대의 부담을 고려해 최소한의 책임을 지는 게 중요하다”며 보험료율을 1%포인트만 인상하는 안을 내놨다. 정부는 2017년 12월 국민연금 제도발전위원회를 출범시켜 연금 고갈 시기를 늦추는 개혁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작년 말 보건복지부는 네 가지 개혁안을 제시하고 사회적 합의 기구인 경사노위에 공을 넘겼지만 9개월 동안 허송세월만 보냈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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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료 인상 안된다" 靑 질책에…국민연금 개혁안 '예고된 실패'
“처음부터 국민연금 개혁 의지가 없었던 데 따른 예고된 참사다.”
30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국민연금 제도 개혁을 위한 단일안을 마련하는 데 끝내 실패하자 나온 연금 전문가들의 평가다. 국민연금은 지금 제도로는 2057년에 연금 기금이 바닥난다. 이에 따라 ‘국민연금이 지속 가능하긴 한 것이냐’는 불신이 팽배하다. 그런데 정부는 재정 안정화를 위한 보험료 인상 등 개혁은 외면한 채 소득대체율(생애 평균소득 대비 연금 수급액) 인상에 방점을 둔 비현실적인 방안에만 매달렸고 결국 2년 가까운 시간만 허비한 채 이날의 결과에 이르렀다는 지적이다.
“보험료 인상 안 돼” 靑 지시 후 의지 꺾여
국민연금 개혁 추진에 이상 징후가 본격적으로 감지된 건 지난해 하반기였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11월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9%에서 11~12%로 즉시 올리는 안이 포함된 제도 개편안을 청와대에 보고했다. 전문가 위주로 구성된 국민연금 제도발전위원회가 약 1년간 논의해 도출한 내용을 바탕으로 마련한 안이었다. 이때만 해도 정부는 국민연금 재정 안정에 대한 의지가 어느 정도 있었다. 복지부 안에 소득대체율을 높이는 내용도 같이 들어 있었지만 보험료를 시급히 올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개편안을 전면 재검토하라”며 퇴짜를 놨다. 당시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보험료 인상 부분이 국민의 눈높이에 가장 맞지 않는다고 대통령이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준비한 개편안 내용이 미리 언론을 통해 알려지며 반대 여론이 커지자 ‘국민 부담을 안 늘리겠다’며 바로 물러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부터가 ‘보험료 인상 없이 소득대체율 40%→50%(2028년 기준)’이기도 했다. 국민이 좋아할 만한 연금 인상만 약속한 셈이다.
청와대 질책에 복지부의 개혁 의지는 크게 꺾였다. 작년 12월 내놓은 복지부의 제도 개편안은 ‘현행 유지안’을 포함한 사지선다였다. 정부안은 보통 단일안 아니면 2개 복수안인데 4개나 제시한 것을 두고 “아무런 결정을 안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4개 안 중에는 소득대체율을 45~50%로 높이면서 보험료를 12~13%로 올리는 방안도 있었지만, 보험료 인상 시점은 대체로 다음 정부였다. 현 정부 안에선 2021년에야 1%포인트 인상하는 게 다였다.
사회적 대화는 공전
정부는 이후 국민연금 개혁을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사노위로 떠넘겼지만 여기서도 논의는 헛돌았다. 노동계와 경영계 간 이견이 팽팽히 맞선 탓이다. 노동계는 정부안 가운데 ‘소득대체율 45%, 보험료 12%(현 정부에선 1%포인트 인상)’를 고집했고 경영계는 현행 유지안을 주장했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애초 정부의 개혁 의지가 크게 후퇴해 제대로 된 개혁안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이날 경사노위 ‘국민연금개혁과 노후소득보장 특별위원회(연금특위)’는 하나의 개편안을 마련하는 데 실패하고 노동계, 경영계, 일부 위원이 주장한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하는 데 그쳤다. 노동계안이 다수안이었지만 사회적 합의를 하려고 만든 기구에서 일치된 지지를 받지 못한 안이어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장지연 연금특위원장도 “사회적 대화에서 다수안이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가 제한적”이라고 밝혔다.
국민연금 개혁은 ‘타이밍’이 중요한데 정부가 시간을 질질 끈 것이 실패의 한 요인이란 분석도 나온다. 경기가 좋았던 지난해 상반기만 해도 보험료율 인상에 대한 저항이 덜할 수 있는데 지금은 경기 침체기여서 국민과 기업의 부담이 커졌다는 것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 지속 가능성을 위해선 보험료를 올리는 게 바람직하지만 지금은 기업 경영 상황이 너무 안 좋다”고 토로했다.
윤석명 연구위원은 “향후 국민연금 개혁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모르겠으나 미래 세대를 위해 제도를 개선한 노무현 정부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노무현 정부는 2007년 보험료율을 12.9%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60%에서 50%로 내리는 개혁안을 추진했다. 보험료율 인상은 무산됐지만 소득대체율은 40%까지 내리는 데 성공했다. 그 덕분에 국민연금 기금 고갈 시기가 13년 늦춰졌다.
노경목/서민준 기자 autonom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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