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까지 손실이 얼마라고?”
“연간 영업이익의 30배입니다.”
세계 4위 투자은행(IB) 리먼브러더스 파산 후 첫 거래일이었던 2008년 9월 16일 화요일. 회계 장부를 마감하던 태산엘시디 재무담당자들은 심장이 멎을 듯한 공포와 마주했다. 시중은행과 맺은 외환 관련 파생상품 계약 손실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로 불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코스피지수가 사상 세 번째로 큰 6.1%의 하락폭을 기록했던 그날, 태산엘시디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연간 100억원 안팎의 영업이익을 올리던 우량 수출업체의 흑자 부도였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실물경제 전염과 10월의 대폭락을 예고하는 첫 번째 경고음이기도 했다.
흑자기업의 줄도산
태산엘시디를 비롯한 730여 개 중소 수출기업을 단숨에 파산 위기로 내몬 외환파생상품의 이름은 ‘키코(KIKO: knock in knock out)’였다. 환율 변동위험 회피(헤지)를 목적으로 한 이 계약은 원·달러 환율의 예상 변동 범위를 설정한 뒤 미래 환전금액을 확정하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환율이 계약 이후 6개월간 달러당 900~1000원 범위에서 움직이면 1달러를 950원으로 바꿀 수 있었다.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은 이 계약의 이면에 잠들어 있던 파괴적인 조항을 깨우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 안전자산 선호 심리로 환율이 폭등(달러가치 상승)하면서 ‘환율이 범위 상단(1000원)을 한 차례만 돌파(knock in)해도 계약한 달러의 두 배 이상을 약정환율(950원)로 환전해야 한다’는 독소조항이 동시다발적으로 발동됐기 때문이다. 2008년 봄부터 상승세로 방향을 튼 환율은 리먼 파산 직후인 2008년 9월 16일 하루에만 1160원으로 51원 뛰어올랐다.
2001년부터 7년에 걸친 환율 하락에 익숙했던 수출기업들은 치명상을 입은 채 탈출구를 찾았다. 일부는 더 큰 규모의 키코 계약을 맺어 ‘물타기’를 시도했고, 다른 일부는 계약 청산을 위한 달러를 조금이라도 싸게 구하려 환율의 하락 반전을 기다렸다.
하지만 환율은 그해 11월 24일 1513원까지 치솟으며 총 3조원대 키코 관련 손실과 300여 개 기업의 파산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낳았다.
달러의 고갈
“비용 상관 말고 달러 더 구해!”
키코 피해기업들이 환율 시세판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때, 국내 은행 외화자금 담당자 사이에선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해외 은행들이 각종 외환파생상품 계약을 유지하려면 달러 담보를 더 내놓으라고 닦달했기 때문이다.
국내 은행의 단기 외화채무 잔액은 2008년 9월 말 1600억달러(약 176조원)로 불어나 있었다. 2004년 440억달러의 네 배에 가까운 규모였다. 조선업체 등 기업의 환 헤지 수요 급증에 대응하는 과정에 달러 빚을 늘리는 파생상품 계약을 확대한 결과였다. 국내 은행의 달러 곳간이 비어가고 있다는 소식에 해외 금융기관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환율 폭등으로 각종 계약의 원화담보(채권·예치금 등) 가치가 최소유지한도 밑으로 떨어지자 예치금을 달러로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국내 은행의 하루짜리 달러 차입 금리는 리먼 파산 이전 연 2% 수준에서 9월 17일 연 10%대로 치솟았다. 비슷한 시기 외화자금시장의 달러 조달비용 지표인 스와프베이시스의 역전폭은 4%포인트(1년물 기준)를 넘어섰다. 2006년 0.2%포인트의 20배였다. 1997년 해외 은행들의 급속한 채권 회수 트라우마로 잔뜩 움츠러든 은행들은 곧바로 대출 심사를 강화하며 자금줄을 죄기 시작했다.
일촉즉발의 증권산업
“콜론을 다 회수하겠답니다!”
은행의 태도 변화는 증권산업 전체를 일촉즉발의 위기로 내몰았다. 그동안 은행과 자산운용사로부터 쉽게 받을 수 있던 콜시장 대출(콜론)이 갑자기 끊겨버렸기 때문이다.
콜시장은 금융회사들이 자금관리를 위해 부족한 현금을 손쉽게 빌리고(콜차입), 여윳돈을 저금리에 빌려주는(콜론) 초단기 현금 창고였다. 콜자금의 주요 수요자였던 증권업계는 당시 콜론을 많게는 하루에 10조원가량씩 빌려 썼다. 대부분 만기가 하루짜리였지만 ‘자동 연장’을 염두에 두고 장기채권 투자에 활용하기도 했다.
흑자 부도 불안에 휩싸인 증권사들은 부족한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우량자산을 서둘러 처분했다. 그 여파로 국고채 3년물 금리는 9월 18일에만 연 5.9%로 0.3%포인트 급등(채권가격 하락)했다. 전체 자금시장의 주춧돌인 콜시장의 이상 징후를 포착한 ‘최종 대부자’ 한국은행은 이튿날인 9월 19일 3조5000억원의 콜자금을 긴급 방출했다. 증권사들의 대출은행 격인 한국증권금융도 9월 말까지 1조2000억원의 자금을 공급했다. 하지만 불신과 두려움은 이미 기업금융시장으로 옮겨붙고 있었다.
회사채 가격 폭락
영업자금 대부분을 빚에 의존했던 증권사들은 가장 먼저 비우량 회사채 발행주관(인수) 업무를 중단했다.
이미 은행 대출 창구가 막힌 중소 건설사들의 부도설이 삽시간에 건설산업을 뒤흔들었다. 비교적 사정이 나았던 제조업체들도 치솟는 이자비용에 놀라 투자 계획을 포기하거나 축소하기 시작했다. 신용등급 ‘A’ 회사채 금리(3년물)는 9월 12일 연 7.4%에서 25일 8.0%를 뛰어넘었고, 11월 28일에는 9.5%까지 상승했다.
비우량 기업의 유동성 위기는 호황기 무리한 사업 확장에 나섰던 대기업 그룹사로 빠르게 번졌다. 재무구조가 나쁜 일부 그룹의 유동성 위기설이 증권가에 나돌았다. 1997년 한보그룹으로 시작한 대기업 연쇄 부도를 기억하는 주식시장은 점차 공황 상태로 변해갔다. 미 다우지수가 4년 만에 10,000선 밑으로 되돌아갔던 10월 6일, 코스피지수는 1358로 60포인트(4.2%) 하락하며 대폭락 장세로 접어들었다.
10월의 대폭락
국제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국내 4대 시중은행 신용등급을 ‘부정적 관찰 대상’으로 지정한 10월 16일. 코스피지수는 사상 최대인 126포인트(9.4%) 폭락하며 제2의 외환위기 공포를 키웠다. 키코 손실과 달러 유동성 압박, 대기업 대출의 부실화 등 대형 악재가 쏟아져 금융시스템을 무너뜨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시장을 지배했다. 대기업들의 주가가 무더기 하한가로 추락했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과 전광우 금융위원장이 10월 19일 ‘은행의 외화 차입거래에 정부 지급보증을 제공하겠다’는 특단의 대책을 발표했지만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코스피지수는 10월 24일 938로 10.5% 추락하며 6거래일 만에 사상 최대 하락 기록을 다시 썼다.
한국 정부의 부도위험지표도 무섭게 치솟았다. 정부의 달러채권(외평채) 부도에 대비한 연간 보험료를 뜻하는 ‘크레디트디폴트스와프(CDS)프리미엄’은 연초 보장원금의 0.5%(5년물 기준) 수준에서 10월 27일엔 6.9%로 상승했다. 놀란 한국은행은 당일 9·11테러 사태 이후 처음으로 임시 금융통화위원회를 열고 역대 가장 전격적인 기준금리 인하(연 5.00%→4.25%)를 단행했다. 이튿날엔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에서 “외환위기는 없다”며 위기설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시장은 계속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10월 29일 8% 넘게 치솟던 코스피지수는 C&그룹 부도설로 3.0% 하락 마감했다. 하루 변동폭으로는 사상 최대 기록이었다. 사이드카(주가 급등락 경고)는 10월 한 달에만 코스닥시장 10번을 포함해 22차례나 발동했다.
양적완화의 시대로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던 증시는 10월 30일 새벽 미국에서 날아든 낭보로 극적인 반전을 맞았다. 한국은행과 미 중앙은행(Fed)이 300억달러(약 43조원)를 필요할 때 시장 환율로 맞교환하는 ‘통화스와프’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이었다.
강만수 장관과 신제윤 국제업무관리관(차관보), 이광주 한국은행 국제담당 부총재보 등이 얻어낸 이 성과는 그날 코스피지수를 사상 최대인 11.9% 밀어올렸다. 덕분에 최대 35.2%(24일 기준)에 달했던 10월의 코스피지수 하락률은 최종 23.1%로 마감했다. 외환위기 당시인 1997년 10월의 27.3%에 이어 월간 낙폭으로는 사상 두 번째였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발원지인 미국은 2008년 12월 기준금리를 연 0.25%까지 낮추며 고용 회복을 시도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더 이상 금리 수단을 쓸 수 없었던 벤 버냉키 Fed 의장은 2009년 3월부터 미 국채를 사들여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전대미문의 조치에 들어갔다. 소규모 개방 경제인 한국도 2014년 10월까지 5년 반 동안 이어진 이른바 ‘양적완화(QE)의 시대’로 휩쓸려 들어갔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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