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사진)이 지난해 11월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같은 해 9월 수석부회장에 올라 그룹 경영을 총괄한 지 두 달가량 지난 때였다. 당시 그의 머릿속엔 이미 ‘그림’이 그려진 듯했다. 정 수석부회장이 밝힌 구상은 △인적 쇄신 △조직문화 혁신 △미래 자동차 투자 및 협업 확대 △중국 사업장 조정 등이었다. 오는 14일 정 수석부회장이 그룹 경영을 도맡은 지 1년이 된다. 정 수석부회장이 말한 그때의 ‘그림’은 어느 정도 현실화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 수석부회장의 ‘색깔’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면서 현대차그룹의 변화 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조직문화 상전벽해
정 수석부회장 행보는 ‘그림’대로 였다. 작년 12월 가장 먼저 파격적 ‘쇄신 인사’를 단행했다. 자신과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둘째 사위인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을 제외한 그룹 내 전문경영인 부회장 5명 중 4명을 인사 대상에 올렸다. 연구개발(R&D)을 책임져온 양웅철·권문식 부회장을 내보내고 김용환·우유철·정진행 부회장을 계열사로 이동시켰다. 나이 든 경영진을 상당수 물러나게 하고 50대 중후반 및 60대 초반 사장들을 전면배치하는 ‘세대 교체’를 했다.
파격은 거듭됐다. 외부 인재 영입을 통한 ‘순혈주의 타파’로 이어졌다. 올 들어 경쟁사인 포스코 출신 안동일 전 포항제철소장을 현대제철 생산기술 담당 사장으로 영입하면서 업계를 놀라게 했다. 글로벌 최고운영책임자(COO)직을 신설하고 닛산 최고성과책임자(CPO) 출신인 호세 무뇨스 사장을 임명했다. 현대차가 외국인을 사장급 임원으로 영입한 것은 처음이다. 그룹 내 외부 출신 사장만 5명으로 늘었다. 이 중 외국인만 3명이다. 한 임원은 “몇몇 가신들이 그룹을 주도하던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말했다.
삼성 등 다른 그룹 움직임을 보며 적당히 따라가던 기존 관행도 사라졌다. 대표적 사례가 ‘정기 공채’ 폐지다. 현대·기아차는 올해부터 정기 공채를 완전히 없애고 수시 채용을 도입했다. 국내 10대 그룹 중 수시 채용으로 전면 전환한 것은 처음이다. 자율복장 제도도 도입했다. 흰색 셔츠에 넥타이를 맨 직원을 서울 양재동 본사에서 보기 어려워졌다.
‘군대 문화’를 떠올리게 했던 현대차그룹의 조직문화도 확 바뀌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소통’ 구조의 변화다. 대표적 사례가 정 수석부회장과 임원들 간 라운드테이블 미팅이다. 매달 열리는 정기 임원회의와 달리 이 모임엔 특별한 안건이 없다. 형식은 차담회(茶談會)를 빌렸다. “우리의 고객은 누구인가” “현대차그룹의 유산 중 무엇을 지키고, 버려야 하는가” 등이 대화 주제로 오르내린다.
직급체계도 바뀌었다. 현대차그룹은 이달 초부터 기존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 등 5단계 직급 체계를 ‘매니저’와 ‘책임매니저’ 2단계로 축소했다. 앞서 ‘이사대우-이사-상무-전무’로 이어지던 임원 직급체계도 ‘상무-전무’로 단순화했다.
빨라진 의사결정체계
경영 및 사업 방식도 변화하고 있다. 예전에 볼 수 없던 선제적 구조조정이 대표 사례로 꼽힌다. 현대·기아차는 중국 판매 부진이 장기화하자 올 들어 각각 현지 1공장 가동을 전격 중단했다. 대신 동남아시아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인도네시아 등에 완성차공장을 짓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임은영 삼성증권 연구원은 “(중국 구조조정과 관련해) 정 수석부회장 체제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토론만 벌이고 있을 것”이라며 “그룹의 의사결정 속도가 빨라졌다는 증거”라고 평가했다.
미래차 시장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한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현대차는 최근 글로벌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투자를 확대해 미래차 기술을 선점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과거 다른 그룹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부 투자에 소극적이라는 지적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한 달에 한 번꼴로 전략적 투자에 나서고 있다. 차량공유 기업부터 자율주행 기술 보유 업체, 드론(무인 항공기) 기술 기업 등 분야도 다양해졌다. 정 수석부회장은 올초 시무식에서 “(현대차그룹은) 더 이상 자동차 제조업의 추격자가 아닌, 시장 판도를 주도하는 게임체인저로 도약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고태봉 하이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그룹 임직원이 이제 변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란 위기감을 갖게 한 게 ‘정의선 체제’의 가장 큰 변화”라고 했다.
‘본게임’은 이제부터라는 관측도 있다. 정 수석부회장이 앞으로 풀어내야 할 과제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 시장 판매 부진 장기화 및 ‘트럼프발(發) 관세폭탄’ 리스크가 현대·기아차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우려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국내외 과잉 생산설비를 조정하고 치열한 미래차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숙제도 놓여 있다. 지배구조 개편 및 추가 인적 쇄신 등도 녹록지 않을 전망이다.
장창민 기자 cm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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