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는 왕실의 공전과 귀족의 사전으로 나뉘었지요…11세기 말엔 모두 공전으로…관리는 토지 아닌 녹봉 받아

입력 2019-09-09 09:00  

936년, 고려는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신라의 귀순을 받아들여 청천강 이남의 영역에 한하지만 한반도를 다시 통일했다. 고려는 이전의 신라와 마찬가지로 전국의 토지를 국전(國田), 곧 국왕의 소유로 간주하는 이념에 기초해 토지와 백성에 대한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왕건과 호족세력

전국의 토지는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으로 구분됐다. 공전은 왕실과 정부가, 사전은 귀족·관료·중앙군의 지배세력이 조(租)를 수취하는 토지를 말했다. 신라와 마찬가지로 공과 사의 대립과 통합이 국왕과 지배세력의 수준에서 성립한 것이 고려의 국가체제였다.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은 사의 주체로 인정되지 않았다.

973년과 992년의 두 법령에서 확인되는 공전과 사전의 조세율은 각각 4분의 1과 2분의 1이었다. 그로 인해 10세기 말까지 고려의 국전제(國田制)는 명분에 불과했다. 사전은 귀족·관료의 사령(私領)과 같았다. 개선사 석등기에서 보듯이 9세기 말 사전의 조세율은 4분의 1이었다. 그것이 후삼국기의 혼란 통에 두 배로 올랐다.

태조 왕건은 호족의 도움으로 후삼국을 통일했다. 초창기의 고려는 호족과의 연합체였다. 호족은 점차 중앙정부의 귀족·관료로 편입되지만, 여전히 그들의 사령에서 수확의 절반을 수취했다. 고려는 그것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다.

고려가 호족세력을 누르고 집권적 지배체제를 완성하는 것은 거의 11세기 말이 돼서였다. 그 같은 추세는 귀족·관료에게 토지를 나누는 제도에서 잘 드러났다. 940년 역분(役分)이란 명분의 사전을 지급했다. 976년에는 전시(田柴)라 해 토지만이 아니라 연료를 채취하는 산지도 지급했다. 역분과 전시의 지급에는 체계적인 기준이 있지 않았다. 호족 출신은 지위가 낮아도 높은 지위의 관료보다 더 많은 전시를 받았다.

거란과의 전쟁

고려의 집권체제는 성종(981~997)과 현종(1009~1031) 연간에 크게 정비됐다. 거란과 벌인 세 차례의 전쟁이 그 배경이었다. 성종은 중앙군을 강화하고 주현(州縣)에 수령을 파견했다. 그러고선 호족이 보유한 군사력을 주현군(州縣軍)이란 이름의 지방군으로 편성해 수령의 통제 아래 뒀다. 이전까지 중앙정부의 재정은 조세와 공물의 운반을 담당한 호족세력에 의해 좌우됐다. 고려는 전국에 13개 조창(漕倉)을 설치하고 조세와 공물의 조운(漕運)을 직접 장악했다.

그와 더불어 세 차례에 걸쳐 사전 지급의 제도가 개정됐다. 호족이라 해서 관직도 없이 많이 받는 관행이 사라졌다. 사전은 제1과에서 제18과까지 관계(官階)에 따라 차등 지급됐다. 지방세력에 대한 지급은 대폭 축소됐다. 그 대신 중앙군에 대해서는 하급의 마군과 보군에 이르기까지 토지를 지급했다. 1076년의 마지막 개정은 곧바로 녹봉제(祿俸制)의 시행으로 이어졌다. 약 3000명의 문무관에게 토지를 대신해 녹봉을, 다시 말해 현물로 월급을 지급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중앙의 귀족·관료가 출신지의 사령을 직접 관리하는 관계와 그를 통해 맺어진 지방세력과의 연대가 끊어졌다.

전호로 바뀐 농민

그 연장선에서 1108년 고려왕조는 공·사전을 망라한 전국의 농민을 전호(佃戶)라는 지위로 규정했다. 전(佃)은 토지를 빌려서 경작한다는 뜻이다. 전호라 함은 오늘날의 표현으로 소작농을 말한다. 11세기 말 전국의 토지를 국전으로 지배하는 고려의 집권체제는 거의 완성된 상태였다. 12세기 초의 전호 규정은 그런 시대적 상황을 전제한 것이었다. 고려의 농민은 호족의 지배에서 벗어나 국왕의 자애로운 보살핌을 받는, 국왕의 땅을 빌려 경작하는 공민(公民)으로 바뀌었다. 그와 더불어 공전과 사전의 조세율이 4분의 1로 같아지기 시작했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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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년 고려왕조는 공·사전을 망라한 전국의 농민을 전호(佃戶)라는 지위로 규정했다. 전(佃)은 토지를 빌려서 경작한다는 뜻이다. 전호라 함은 오늘날의 표현으로 소작농을 말한다. 11세기 말 전국의 토지를 국전으로 지배하는 고려의 집권체제는 거의 완성된 상태였다. 12세기 초의 전호 규정은 그런 시대적 상황을 전제한 것이었다. 고려의 농민은 호족의 지배에서 벗어나 국왕의 자애로운 보살핌을 받는, 국왕의 땅을 빌려 경작하는 공민(公民)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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