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SK에 선전포고, KT·쿠팡 '갑질' 신고…LG가 달라졌다

입력 2019-09-09 17:39   수정 2019-09-10 09:13

수년 전 삼성의 한 고위 임원이 3D TV를 개발하던 LG 연구원들을 대놓고 비판했다. 공개석상에서 ‘험한 말’이 나올 정도였다. LG그룹 내에선 강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기류가 적지 않았지만 결국 삼성의 사과를 받고 더 이상 문제삼지 않기로 결론냈다. 이랬던 LG가 확 달라졌다. LG전자는 세계 언론이 주목하는 국제 행사에서 “삼성의 초고화질 TV가 가짜”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LG화학은 국내외 법원에서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기술 탈취 혐의로 소송을 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넘어가던 LG가 ‘독해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이젠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LG전자가 삼성전자와 신경전을 벌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가전 라이벌’인 두 회사는 TV와 에어컨, 냉장고 등의 기술과 디자인을 놓고 ‘누가 베꼈고, 어떤 제품의 품질이 더 뛰어난지’에 대해 끊임없이 논란을 벌였다. 과거엔 그래도 국내외 1, 2위를 두고 벌이는 전자업계 내 경쟁이었다.


지금은 양상이 다르다. 전자뿐만 아니라 화학, 통신, 유통 할 것 없이 전방위적이다. 그것도 싸움을 걸어오면 받아치는 수세적 양상이 아니다. 상대방을 향해 선제적으로 움직이는 게 지금 LG의 모습이다.

LG전자는 삼성의 간판 제품인 QLED 8K TV를 걸고넘어졌다. 박형세 LG전자 TV사업운영센터장(부사장)은 지난 7일 유럽 최대 가전전시회 ‘IFA 2019’에서 “삼성전자 QLED 8K TV는 화질이 떨어져 사실상 4K TV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삼성의 반응을 예상한 듯 삼성 TV를 ‘저격’하는 광고도 시작했다.

LG화학은 지난 4월 배터리 기술 탈취 혐의로 미국 법원에 SK이노베이션을 제소했다. LG화학이 소송에서 이기면 SK이노베이션이 건설 중인 미국 공장의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내용이 강경하다. SK이노베이션이 맞제소하자 LG화학은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SK이노베이션에 재발 방지 약속과 정당한 배상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뿐만 아니다. LG유플러스는 7월 SK텔레콤과 KT를 ‘불법보조금 살포 혐의’로 방송통신위원회에 신고했다. 2014년 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단통법) 시행 이후 통신사끼리 신고하는 일은 처음이다. 6월엔 LG생활건강이 이례적으로 온라인 유통업계 1위인 쿠팡을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했다. 쿠팡의 요구를 따르지 않자 주문을 취소하며 권한을 남용했다는 게 LG생활건강의 주장이다.

‘반드시 이기겠다’는 LG 내 분위기는 기술 경쟁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LG디스플레이는 7월 일본의 경제보복 이후 처음으로 일본산 불화수소(에칭가스)를 국산으로 대체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변했나

리더십의 변화가 ‘독한 LG’로 탈바꿈한 배경이 됐다는 평가가 많다. 지난해 6월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취임한 뒤 ‘우리도 한 번 해보자’는 분위기가 그룹 전체적으로 확산됐다는 얘기다.

구 회장은 취임 이후 변화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9월 임직원이 정장 대신 자율복장으로 근무하도록 했다. 지난달부터 팀장 이상급은 무조건 한 달에 한 번 이상 쉬도록 하는 ‘리더 없는 날’(무두절)을 운영하고 있다. 구 회장은 대내외 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과감하게 도전하고, 꿈과 열정을 다해달라”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그룹 내에서도 “LG가 사업을 지속할 수 있게 공정한 경쟁 환경을 확립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일각에서는 경영 환경 변화가 LG를 독하게 바꿔놨다는 분석도 내놓는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그룹의 양대 축인 LG화학과 LG전자가 사상 최대 실적을 냈지만 올 들어 분위기가 급변했다. 두 회사의 올 상반기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보다 뒷걸음질쳤다. LG디스플레이는 상반기에만 5008억원의 적자를 냈다. 그룹 내 미래 산업으로 꼽히는 자동차 부품과 인공지능(AI) 사업에서도 이렇다 할 실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고전을 면치 못하는 스마트폰과 통신 사업에서는 5G(5세대) 시대가 마지막 기회라는 위기감도 퍼져 있다.

LG그룹 관계자는 “임직원 대부분이 변화를 체감할 정도로 많은 게 바뀌었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커졌다”며 “한 단계 도약할 기회를 잡기 위해 임직원이 각오를 다지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정인설/김재후/고재연 기자 surisur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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