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창업해 100년 이상 이어온 장수기업 보진재가 본업인 인쇄사업에서 철수한다. 인쇄업 불황에 따른 적자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회사 매출 중 인쇄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98%에 달한다. 사실상 사업을 접는 절차를 밟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9일 출판·인쇄업계에 따르면 보진재는 오는 11월 말부터 인쇄업을 중단하기로 했다. 지난 3일에는 경기 파주시 출판단지에 있는 인쇄공장과 토지를 145억원에 처분하는 계약을 했다. 회사 관계자는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부동산을 처분하기로 했다”며 “인쇄공장을 판 뒤 사업구조를 어떻게 재편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보진재는 고(故) 김진환 창업주부터 그의 증손인 김정선 현 대표까지 4대째 가업을 이어왔다. 두산(1896년 설립) 동화약품(1897년) 몽고식품(1905년) 광장(1911년) 성창기업(1916년) 등과 함께 국내 몇 안 되는 ‘100년 장수기업’ 중 하나다.
보진재는 다음달 18일 주주총회를 열어 인쇄공장 및 부동산 매각 안건을 처리할 예정이다. 주주총회에서 안건이 통과되면 11월 말 인쇄업을 접고 12월 초에 매각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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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인쇄 수요 급감에 공장 매각
10년째 적자…4대 이은 가업 포기"
보진재는 국내에 현존하는 인쇄소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보진재석판인쇄소라는 사명으로 출범한 뒤 한국 인쇄업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24년에는 민간기업 최초로 오프셋 인쇄(간접 인쇄) 기기를 도입했다. 1933년에는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인쇄했다. 1970년대 대학입학 학력예비고사 시험지와 각종 교과서도 이 회사 인쇄공장을 거쳤다. 박엽지(얇은 종이) 인쇄에 강점을 보여 세계 120여 개국의 성경을 인쇄하기도 했다. 1996년에는 인쇄업계 최초로 코스닥시장에 상장(2005년 상장폐지)했다.
출판·인쇄업계에서는 인쇄업황 악화에 따른 실적 부진을 인쇄공장 매각의 배경으로 꼽고 있다. 보진재 역시 공시를 통해 “거듭된 적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쇄업을 접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회사는 올해 상반기 매출 46억원에 영업적자 4억원을 냈다. 지난해 매출은 82억원에 영업손실은 9억원이었다. 2009년부터 10년 연속 적자행진을 지속하고 있다.
출판업계 관계자는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디지털 콘텐츠 소비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전통적인 종이 인쇄 수요는 줄어들고 있다”며 “인쇄업체 간 경쟁은 치열해지는 반면 이익은 줄어 폐업을 선택하거나 고려하는 인쇄업체가 많다”고 전했다. 인터넷·모바일 전자출판제작업의 매출은 최근 3년 동안 연평균 15%씩 성장하며 종이 인쇄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보진재 최대주주는 김정선 대표(지분율 40.5%)다. 김 대표의 특수관계인 및 진학회관(8.9%), 진학사(5.8%) 등도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이 회사 주식은 장외시장인 K-OTC에서 거래되고 있다. 시가총액은 45억원이며 소액주주 지분율은 15.7%(지난해 말 기준)다.
이고운/윤정현 기자 cca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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