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수꾼'에서 번뜩이는 눈빛을 자랑했던 고등학생 희준이 자라 타짜가 된다면 이런 모습일까. '파수꾼'으로 혜성같이 데뷔한 후, '동주'의 거침없는 독립투사 송몽규를 거쳐 피아노를 치고(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랩을 하다가(영화 '변산'), 신비로운 주문까지 외웠던(영화 '사바하') 박정민이 타짜로 돌아왔다. 올해로 데뷔 9년차. 배우가 되기 위해 남들이 부러워했던 명문대를 박차고 나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에 진학했고, 또 연기과로 전과까지 하며 노력했던 박정민은 영화 '타짜:원 아이드 잭'을 통해 명실상부 원톱 주연으로 자리매김했다.
'타짜:원 아이드 잭'은 전설적인 타짜 짝귀(주진우)의 아들이자 공시생인 일출(박정민)이 포커판에 입문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원 아이드 잭, 애꾸 역의 류승범을 비롯해 권해효, 윤제문, 우현 등 기라성같은 선배 배우들이 출연하지만 극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박정민이었다.
그동안 차근차근 성장하며 자신만의 연기력을 보여줬던 박정민은 '타짜:원 아이드 잭' 개봉을 앞두고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데뷔 때부터 보여준 진심은 그대로였다. 매 순간 솔직하고 진솔하게 인터뷰를 했던 것처럼 '타짜:원 아이드 잭'을 위해 만났을 때에도 한마디 한마디 진중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뱉으며 진정성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첫 원톱 주연 영화다. 어떻게 봤나.
어떤 실수를 했는지 보느라 사실 영화가 어땠는지 기억이 잘 안난다. 아직까지 객관화가 안되는 것 같다. 어떤 영화든 좋은 반응, 나쁜 반응이 있기 마련인데 좋은 반응을 보면서 힘을 얻고 홍보에 박차를 가하려 한다.
특히 어떤 말에 힘을 얻었나.
'재밌다'는 말이 가장 기분 좋다. '타짜' 시리즈는 전작들이 워낙 사랑을 받아서 기대도 컸고, 우려도 많았다. 주변 사람들 반응이 꽤 괜찮았다. 제 친구들이나, 책방 아르바이트생 친구들에게 영화를 보여줬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반응이 나와서 기분이 좋다. 그래도 결과는 개봉을 해봐야 아는 거라. 긴장된다.
'멋있다', '섹시하다'는 반응도 적지 않다.
신기루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웃음) 곧 없어질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사실 정말 멋있는 사람이 필요했다면 저에게 이 시나리오 자체가 오지 않았을 거다. 제 나름대로 멋있게 보이려 했지만, 그건 '타짜' 안에서 어울리기 위한 노력이었다. 저를 캐스팅한 거 자체가 평범한 인물이 겪는 풍파가 어떻게 인생을 변화시키는가를 보여주려고 하신 게 아닐까. 도일출이 점점 메말라가는 정서를 외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는데, 그러다 보니 살이 빠졌고, 생전 처음 듣는 '멋있다'라는 말도 듣는 거 같다.
전작 '사바하' 때와 차이가 커서 그런게 아닐까. '사바하'에서는 머리도 노랗게 염색하고, 피부도 거친 모습으로 나오지 않았나.
'사바하' 때와 비교한다면, 그보다 못나게 나오기도 힘들었을 거다.(웃음) 연출자였던 장재현 감독님께서 우스갯소리로 '네 미래를 위해 일부러 못난 장면만 넣었다'고 하시기도 했다. '잘생기게 나온 컷을 넣으면 시장이 겹칠 수도 있다고, 박정민은 박정민의 길을 가야한다'는 말을 하시더라.
'타짜:원 아이드 잭'을 찍으면서 살이 20kg이나 빠졌다고 하더라. 어떻게 그렇게 뺀 건가.
운동하기도 힘들고, 따로 나가기도 쉽지 않아서 무작정 굶었다. 촬영을 하면서 고민스러운 부분도 있어서 더 많이 빠진 거 같다. 사실 입금되면 다 그렇게 뺄 수 있다. 입금됐는데도 못 빼면 그건 배임이다.(웃음)
지난 인터뷰 때까지만 해도 '로맨스는 불가능할 거 같다'고 했는데, 최유화과 농도 짙은 베드신까지 소화했다.
저는 로맨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일출이 마돈나(최유화)가 던진 미끼를 문 거다. 거기에 계속 끌려다닌 거지 사랑을 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도 로맨스는 자신이 없다. 베드신도 지금껏 연기한 것 중 최고 수위였다. 걱정도 많이 했고, 긴장도 컸는데 유화 누나가 성격도 좋고 열심히 해주셔서 무리 없이 마칠 수 있었다. 예민할 수 있는 장면이었는데 웃으면서 찍었다.
'타짜2' 오디션에서 떨어졌는데, 이번엔 주인공으로 돌아왔다고 하더라. 그래서 출연을 결심한 건가.
제가 '타짜2' 오디션을 봤다는 건 제가 출연을 결심한 후 한참 후에 인지했다. 갑자기 문득 '그래, 내가 '타짜2' 오디션을 봤었지' 하고 생각이 들더라. 제 위치를 확인하는 게 건방지긴 하지만 뿌듯했다. 지금까지 해 온 노력을 증명해보인 순간 같았다. 그렇지만 출연을 결심한 건 감독님 때문이었다. 일단 시나리오가 재밌었고, 맞춤법이 거슬리는게 없었다. 개인적으로 맞춤법이 틀린 시나리오를 못 견뎌 하는 편인데, '이 정도 공을 들이는 분이면 영화도 허투루 찍진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무엇보다 저에게 보내주신 이메일도 엄청난 문장력을 구사했다. 저를 지난 10년 동안 봐왔다는 내용이었는데, 캐스팅하고 싶어서 입에 발린 말을 하는 내용이 아니었다.
박정민 씨도 류승범 씨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나. (류승범은 시사회에서 박정민의 편지를 보고 출연을 결심했다고 밝힌 바 있다.)
제가 감히 '출연해 달라'고 쓰진 못했고, 선배를 보며 어릴 때부터 꿈을 키우던 학생이었고, 배우가 됐다. 그런 나날들에 감사하고, 계신 곳에서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그런 내용이 담긴 팬레터였다. 그걸 보내고 저도 잊고 있었는데 시사회에서 그 말을 해주셔서 정말 감동적이었다. 시사회에 와 주신 것 자체로 힘이 되고, 감사해서 눈물이 날 뻔했는데, 울음을 참으려 일부러 천천히 말했다.
꿈에 그리던 선배와 함께 작업을 하니 어떻던가.
본인의 경험담을 많이 얘기해주셨다. 저보다 어린 나이일 때 이미 훌륭한 배우로 한국 영화계에서 활약하지 않았나. 본인이 제 나이 때 겪은 혼란들, 걱정들을 풀어주면서 '네가 고생이 많고, 너무 스트레스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셨다. 요즘도 예쁜 풍경을 보면 승범이 형의 긴 머리가 생각이 난다. 그럴 땐 또 메일을 보낸다.
이렇게 열심히 촬영하고, 작품 활동을 하는데, 책방 사장님까지 됐더라.
올해 3월에 친구와 함께 오픈했다. 원래 골목 안쪽에 작게 있었는데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공간을 넓혀 대로변으로 나오게 됐다. 책방엔 꾸준히 간다. 재고 파악도 하고, 필요한 건 없는지 다 체크도 해야 하니까. 스트레스를 덜어내는 공간이다. 거기서 대본도 보고, 책도 본다.
얼마 전엔 '쓸 만한 인간'이라고 책도 내지 않았나. 책방에 작품 활동까지 하면 언제 쉬나.
제가 놀 줄 모른다. 술도 못 마시고. 책은 예전에 쓴 책을 개정해서 나온 거다. 생각 없이 쓴 글에 불편함을 느끼는 분들이 있다는 걸 알게됐고, 상처받는 사람들도 계시더라. 작가도 아닌 놈이 뭘 모르고 글을 썼다가 저도 내상을 입었다. 반성도 하고. 그래서 더 편하게 보실 수 있게 수정해서 책을 내게 됐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SBS '너희들은 포위됐다'를 함께했던 차승원, 후속작 '시동'을 함께 촬영했던 마동석과 맞대결하게 됐다.
두 분다 좋은 선배님인데 제가 감히 어떻게 경쟁을 한다고 할 수 있겠나. 영화대 영화로 같이 개봉해서 결과를 기다리는 건데, 다 잘됐으면 좋겠다. 마동석 선배에겐 얼마 전에 '타짜 1000만'이라는 문자도 받았다. 이렇게 후배를 응원해주시는 마음이 감사했다. 이렇게 아껴주시니 저도 선배를 응원할 수밖에 없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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