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자금 넘치는데…돈이 안 돈다

입력 2019-09-15 17:07   수정 2020-11-04 18:33


시중 부동자금이 가파르게 늘고 있지만 소비·투자로 연결되지 않는 ‘돈맥경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대내외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경제주체들의 투자심리가 위축된 결과로 보고 있다.

15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현금과 현금성 자산을 의미하는 부동자금은 지난 6월 말 기준 983조3875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돈이 얼마나 잘 도는지를 나타내는 통화승수(광의통화(M2)÷본원통화)는 올해 1, 2분기에 모두 15.7을 기록하며 역대 최저치로 떨어졌다. 통화승수는 2014년 20 밑으로 내려갔고 2017년 이후엔 하락 속도가 더 빨라졌다. 통화승수는 한은이 돈(본원통화)을 풀면 투자와 신용창출 등을 통해 시중자금(M2)이 얼마나 불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통장 잔액 대비 인출금 비율을 나타내는 은행 요구불예금 회전율도 6월 17.3회를 기록, 역대 최저치로 떨어졌다. 요구불예금 회전율은 2008년 금융위기 직전까지 월평균 30회를 웃돌았지만 이후 내림세를 지속하고 있다. 경제주체들의 현금 보유 성향이 강해지면서 돈이 생산·투자 활동에 쓰이지 못하고 통장에 묶여 있다는 의미다. 연간 명목 국내총생산(GDP)을 시중통화량으로 나눈 통화유통속도도 지난해 0.72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시중금리가 사상 최저 수준에 도달하면서 시중에 떠도는 자금이 넘쳐나지만 소비와 투자 등 실물경제로 흘러가지 않고 있다고 보고 있다. 설비투자 증가율은 올해 2분기까지 5분기 연속 마이너스(전년 동기 대비 기준)를 기록했다. 반면 은행 예금은 6월 말 기준 1454조3925억원으로 역대 최대다. 이인호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중 무역분쟁 등 대내외 변수에 위축된 경제주체들이 안전자산을 확대한 데 따른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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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돈 풀고 금리 내려도 은행서만 맴돌아…소비·투자로 연결 안된다

돈이 돌지 않고 있다. 돈은 실물경제에 피 같은 존재다. 돈이 잘 돌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경제활력이 떨어졌다는 징후다. 정부의 재정투입 확대,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 등으로 시중에 돈이 대거 공급되고 있다. 하지만 소비·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단기예금 등으로 금융권에서 머무는 부동자금은 1000조원대로 사상 최대 규모로 불어났다.

미·중 무역분쟁을 비롯한 대내외 불확실성이 부각되면서 가게와 기업들의 투자 심리가 얼어붙은 탓이다. 올 들어 물가상승률이 0%대 수준을 지속하는 등 디플레이션 징후가 나타나는 것도 경제주체들의 심리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물가가 내려갈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되면서 소비를 미루고 상대적으로 가치가 부각된 현금을 보유하려는 유인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예금 1450兆 넘어

15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현금과 현금으로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요구불예금, 수시입출식 저축성예금, 머니마켓펀드(MMF) 등을 합친 부동자금은 지난 6월 말 기준 983조3875억원에 달했다. 올 들어서만 28조1965억원 늘었다. 같은 기간 국내 은행의 예금(말잔)은 1454조3925억원으로 사상 최대다. 안전자산 쏠림현상은 올 들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신한·국민·우리·KEB하나·농협은행 등 5대 시중은행의 정기예금 잔액은 지난 한 달 동안에만 무려 11조5000억원 늘었다. 올 하반기 들어 미·중 무역분쟁이 한층 격화된 데다 지난 7월 일본의 수출규제가 본격화하면서 경제주체 심리에 반영된 결과다.

정부는 올 들어 6월 말까지 올해 총 예산(291조9000억원)의 65.4%(190조7000억원)를 썼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내릴 것이라는 기대가 올해 2분기 들어 확산되면서 시중 금리도 내려갔다. 정부 재정·통화정책에 힘입어 시중 유동성이 풍부해졌지만 상당수는 안전자산에 몰렸다. 은행 계좌 등에 돈이 고이면서 통화승수(광의통화÷본원통화) 등 돈의 이동속도는 더뎌졌다. 통화승수는 올해 1, 2분기에 모두 15.7을 기록해 분기 기준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요구불예금 회전율, 통화유통속도 등도 최저 수준으로 내려갔다.

소비·설비투자·주식거래 ‘동반 부진’

‘돈맥경화’ 현상은 실물경제 침체로 이어졌다. 올해 민간소비 증가율(전년 동기 대비)은 1분기 1.9%, 2분기 2.0%를 기록했다. 2017~2018년 분기마다 2~3%대 증가율을 기록한 것과 비교해 1%포인트가량 떨어졌다. 투자는 더욱 부진했다. 설비투자 증가율은 올해 1분기 -17.4%, 2분기 -7%를 기록했다. 설비투자 증가율은 지난해 2분기 -4.3%를 기록한 이후 올해 2분기까지 5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한국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하는 소비와 투자가 부진한 결과 올해 성장률 전망치가 1%대를 기록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도 나온다. 위험자산에서도 돈이 빠져나가고 있다. 올 들어 지난 12일까지 유가증권시장의 하루평균 거래금액은 5조337억원이었다. 지난해 하루평균 거래금액(6조5486억원)과 비교하면 23.1%(1조5149억원) 줄었다.

이처럼 시중에 돈이 돌지 않는 배경으로 우선 은행 가계대출을 옥죄는 규제 등이 꼽힌다. 5만원권 유통이 확산되면서 개인이 장롱 또는 지갑에 현금을 쌓는 경향이 강해진 영향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성장률이 낮아지고 있는 데다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경제주체들의 현금 선호도가 높아진 결과라는 분석이다.

최근 부각된 디플레이션 우려마저 현실화하면 실물경제는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분석도 나온다. 경제주체들이 물가 하락을 예상해 현금을 계속 보유하고 소비·투자는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주체들이 이처럼 움츠러들면 한은이 더 완화적 통화정책을 펼쳐도 투자·소비를 진작하기 어려운 ‘유동성함정’에 빠져들 우려도 크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책과 경기에 대한 경제주체가 느끼는 불확실성이 매우 크다”며 “일관성 있는 통화·재정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물론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동시에 꺼내드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 통화승수

총통화량을 의미하는 광의통화(M2)를 한국은행이 공급하는 본원통화로 나눈 수치다. 한은이 돈을 풀면 시중에서 몇 배의 통화가 창출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수치가 하락한다는 것은 경제주체의 현금 보유 성향이 높아지고 신용 창출은 둔화된다는 의미다. 그만큼 돈이 돌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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