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넓은 평원에 서 있는 2500여 개 파고다
미얀마는 대표적인 불교 국가로, 미얀마 국민 약 89%가 불교신자다. 신자라는 표현이 어색할 정도로, 미얀마 사람에게 불교는 삶 자체다. 발길 닿는 곳곳에 사원이나 파고다가 있다. 사원은 기도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생활의 공간이다. 미얀마 사람들은 친구를 만날 때도, 가족모임을 할 때도, 혼자 고즈넉이 쉬고 싶을 때도 사원이나 파고다를 찾는다. 미얀마에서 사원은 공원이자 카페다.
미얀마 어디에 가든 불교의 진한 향을 감지할 수 있지만,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도시가 바간(Bagan)이다. 미얀마의 젖줄인 에야와디 강(Ayeyarwaddy River) 중류에 있는 바간은 미얀마 첫 번째 통일왕조의 수도였다. 통일왕조를 세운 아노라타(Anawrahta) 왕은 미얀마의 아쇼카 왕이라 할 만큼, 불교로 정신적인 통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쏟았다. 불교가 힘을 받으면서 전국에 사원과 파고다를 세웠다. 11~13세기에는 4000여 개에 달하는 탑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몽골 침략과 1975년, 그리고 2006년 지진으로 많은 파고다가 무너졌지만, 여전히 42㎢의 땅 위에 2500여 개 파고다가 늠름하게 바간을 지키고 있다. 바간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와 함께 세계 3대 불교 유적지로 꼽힌다.
유럽 여행에서 ‘성당’이 중심이듯, 미얀마에서는 ‘파고다와 사원’이 핵심이다. 미얀마 여행은 각양각색의 파고다를 둘러보는 여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고다마다 다른 이야기와 모습을 하고 있어, 하루 종일 파고다만 다녀도 지루하지 않다. 돌을 벽돌처럼 깎아 만든 모전석탑부터 종처럼 생긴 종형 탑, 바루를 엎어놓은 것처럼 생긴 탑 등 여러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금방 무너질 듯 보이는 벽돌더미 파고다부터 견고하게 서 있는 황금빛 파고다까지, 앉거나 눕거나 서 있는 크고 작은 파고다가 진기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1000년 전 누군가의 간절함으로 세워진 파고다는 21세기를 사는 여행자에게 묵직한 생각덩어리를 안겨준다.
미얀마 파고다의 원형, 쉐지곤 파고다
불탑 천지 바간에서 여행자가 모든 파고다를 돌아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대부분 10여 개 파고다를 둘러보고 다음을 기약하며 떠난다. 첫 번째로 꼽히는 파고다는 쉐지곤 파고다(Shwezigone Pagoda)다. ‘황금모래 언덕의 탑’이라는 뜻으로, 현존하는 미얀마 파고다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입구의 어두운 복도를 지나면, 금빛 반짝이는 종 모양의 파고다가 눈을 사로잡는다. 강한 빛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춘다. 쉐지곤 파고다는 약 48.7m 높이로, 1059년 아노라타 왕이 건설했다. 아노라타 왕은 부처님 치아 사리를 안치하기 위해 사원을 세우기로 하고, 사리를 실은 흰색 코끼리가 멈춘 자리에 사원을 지으라고 명했다. 쉐지곤 파고다가 서 있는 자리가 코끼리가 처음으로 무릎을 꿇었던 명당이다. 쉐지곤 파고다는 3단으로 쌓인 기단 위에 원형 탑신부와 뾰족한 상륜부로 이어진다. 기단은 땅을 상징하고 탑신은 하늘을 상징한다.
파고다를 돌다 보면 자그마한 물웅덩이 주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눈길을 끈다. 사람들을 따라 웅덩이 앞에 쪼그리고 앉았더니 수면 위로 거대한 쉐지곤 파고다가 나타났다. 뒤따라온 여행자들도 놀라움을 나타내며, 스마트폰에 진기한 모습을 담느라 분주했다.
쉐지곤 파고다에는 낫(Nat)을 모신 사당도 있다. 낫은 미얀마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있던 정령신앙으로, 낫을 모신 사당은 우리나라 절 ‘산신각’과 비슷하다. 낫은 복을 기원하는 신앙이라기보다는 ‘나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며 달래는 형태의 신앙이다. 미얀마 사람들은 낫을 잘 모셔야 해를 입지 않는다고 믿는다. 쉐지곤 파고다에 있는 낫 사당은 아버지 쉐묘진과 아들 쉐자 부자를 모신 공간이다. 이들은 쉐지곤 파고다에 쌓을 돌을 구하다 산적에게 변을 당한 아픈 사연이 있다. 파고다만큼이나 낫 사당을 찾는 이들이 많다. 파고다를 세운 불심과 낫 사당의 민간신앙이 어우러져 색다르게 다가온다.
우아한 아난다 사원과 웅장한 담마양지 사원
사원의 아름다움을 보고 싶다면 아난다 사원으로 향해야 한다. 아난다 사원은 미술관 같은 사원으로, 동남아시아 사원의 대표적인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낸다. 겉에서 보면 수직과 수평이 세련된 균형미를 이룬다. 안에는 긴 회랑이 이어지고, 회랑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불상이 가득하다.
사원 안에는 동서남북 네 곳에 각각 부처상이 서 있다. 청동처럼 보이지만, 단단한 티크로 조각했다. 남쪽에 있는 불상은 보는 각도에 따라 표정이 다르다. 불상 앞에 놓인 기부상자 옆에서 보면 어쩐지 슬픈 형상이지만, 떨어져 보면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 파고다와 불상에 미얀마의 건축기술과 예술이 다 담겨 있다더니, 구석구석 살펴볼수록 놀랍다. 각 부처상에는 많은 이들이 금박을 붙여놔 화려하다.
고색창연한 담마양지 사원도 빠트릴 수 없는 사원이다. 바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원으로, ‘부처님의 가르침, 진리의 사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피라미드 같은 독특한 모양 때문에 어디에서든 눈에 잘 띈다.
담마양지는 바간왕조 비극의 현장으로, 1167년 포악하기로 악명 높은 나라투 왕이 만들었다. 나라투 왕은 아버지 알라웅시투 왕을 살해하고 형을 독살해 왕좌에 올랐는데, 죄를 참회하기 위해 담마양지를 세웠다. 참회를 위해 짓기 시작했지만, 공사 중에도 포악함을 멈추지 못했다. 벽돌을 쌓아올릴 때마다 바늘을 찔러서 바늘이 들어가면 현장감독을 처형할 정도였다. 인과응보라고나 할까. 결국 자신도 암살당했다.
이 외에도 일몰이 황홀한 쉐산도 파고다와 이와라디 강가 풍경을 볼 수 있는 부 파고다, 우리나라 조계종에서 세운 레미엣나 파고다 등 손꼽히는 파고다만 둘러봐도 며칠이 훌쩍 흐른다.
잊지 못할 바간의 감동 일출
광활한 유적의 도시 바간을 여행하는 방법은 여럿이다. 자전거를 타고 여유롭게 나만의 파고다를 찾아 나설 수도 있고, 마차를 타고 화려한 유적지를 돌아볼 수도 있다. 마차는 바간의 주요 교통수단으로, 주요 사원을 편리하게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다.
특별한 바간을 만나고 싶다면 일출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바간의 장엄한 일출을 본 곳은 아우레움 팰리스호텔 안에 있는 전망대였다. 깜깜한 평원에 빛이 스미고 파고다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말로 형언하기 힘든 감동이 몰려들었다. 해가 떠오를수록 크고 작은 파고다는 빛을 더했다. 차디찬 가슴에 따스함이 스며들고, 사방에 불심이 어려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사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일출의 감동이었다.
타나카도 바르고 대나무 공도 사고, 냥우 시장
현지인의 삶을 보고 싶다면 마니 시뚜(Mani Sithu)를 둘러보자. ‘냥우시장’으로 불리는 이곳에 가면 생생한 에너지가 여행자를 맞는다. 반짝반짝 빛나는 금색 입구를 지나면 미얀마 현지인의 먹거리와 생활용품, 여행자를 위한 기념품이 빼곡하게 쌓여 있다. 어슬렁거리며 구경하기 좋다. 여자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돌가루를 갈아서 만든 천연 화장품 타나카로 볼을 치장하고 있다. 미얀마의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바르는 타나카. 타나카 나무부터 타나카로 만든 비누, 작은 통에 들어 있는 비누 등 다양하다.
특별한 기념품을 찾는다면 앙증맞은 대나무 공도 좋다. 미얀마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이면 즐기는 공놀이, 칭롱에 사용하는 공이다. 칭롱은 미얀마 5짯 지폐에도 그려져 있는 미얀마 대표 놀이로, 열쇠고리로 제작된 작은 공은 가볍고 특색 있어 누구라도 좋아한다.
그릇에 관심이 있다면 미얀마 칠기인 라카웨어(Lacquer Ware)를 살펴보자. 대나무를 엮어 본체를 만들고, 천을 덧대 초벌을 한 뒤 말리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해 만든다. 귀여운 컵부터 화려한 가구까지 다양하다.
바간(미얀마)=글·사진 채지형 여행작가 travelgur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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