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의 논점과 관점]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

입력 2019-10-01 17:41   수정 2019-10-02 00:15

지난 주말 청와대 대변인이 또박또박 읽어내려 간 문재인 대통령의 특별메시지는 ‘총력전 선언’이다. 결코 유리하지 않은 싸움에 대통령은 사생결단의 의지로 참전을 선택했다. 절제된 수사와 검찰의 변화를 강력히 요구하며 ‘조국 수사’를 지휘 중인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분명한 경고를 보냈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여론의 눈치를 보던 소위 ‘진보 진영’ 인사들이 일제히 ‘조국 수호’ 깃발 아래로 몰려들었다. 국민의 분노에 공감한다던 이낙연 국무총리가 과잉수사를 지적하며 태도를 바꿨고, 여당 의원들은 ‘윤석열 낙마’를 공공연히 위협하고 나섰다.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노골적인 수사 개입이다. 불과 두 달 전 “살아 있는 권력도 수사하라”고 주문하더니 ‘권력’이 아니라 ‘권력의 인사권’도 털끝만큼도 건드릴 수 없다며 길길이 뛰는 모습에서 정권의 위선이 적나라하다.

총동원령 내린 진보의 위선

좌파 단체들도 총력전 태세다. 대통령 특별메시지가 나온 지 단 하루 만에 1000여 명의 문인이 ‘조국 지지 작가선언'을 뚝딱 만들어냈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위헌적 쿠데타’ ‘검찰의 난’ 등의 극단적인 언어를 쏟아냈다. 증거가 가리키는 대로가 아니라, 자신들이 가리키는 대로 수사하라며 대놓고 겁박한 셈이다. 대검찰청 앞에서 매주 열리는 ‘조국 수호’ 집회 참석 인원이 급증한 데서도 진보 진영의 결기는 감지된다.

일련의 흐름은 2차대전 때 소련과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로 전황이 기운 상태에서 독일이 결행했던 총력전을 연상시킨다. 당시 독일은 참패 사실을 숨긴 채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고 “모두 일어나 폭풍을 일으키자”는 구호로 결속을 다지며 전황을 호전시켰다.

하지만 결국 나치가 패망한 것처럼 총력전을 펼친다고 해서 적폐세력이 검찰개혁에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게 조국 사태의 본질이라는 궤변이 먹힐 수는 없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신설, 검·경 수사권 조정 등의 검찰개혁 법안은 이미 패스트트랙에 태워져 국회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윤 총장도 국회와 국민의 뜻을 존중하겠다는 의사를 여러 번 밝혔다. 수사 과정에서 불거진 몇몇 논란과 잡음을 침소봉대해 과잉수사로 모는 것도 최소한의 합리성을 결여한 행태다. 유력한 피의자의 휴대폰 압수도, 증거인멸 시도에 대응한 구속영장 청구도 없는 수사는 오히려 ‘과소’에 가깝다. 검찰개혁의 본질이 ‘권력·정치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점에서 서슬퍼런 권력 앞에 선 ‘윤석열호’를 흔드는 일이야말로 개혁 방해일 뿐이다.

집단이익을 진실보다 앞세워

독선과 특권에 무감각한 좌파의 민낯을 지켜보는 대다수 국민의 심정은 ‘분노’와 ‘슬픔’일 것이다. 참여연대의 핵심 간부가 “구역질 난다”고 진저리칠 정도다. 러시아 시인 네크라소프는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갈파했다. 바로 좌파 총력전의 맨 앞줄에 서 있는 유 이사장이 인용해 유명해진 구절이다. 상상 초월의 입시부정과 권력형 주가조작 혐의에 노여워하지 않는 진보라면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구심을 비켜가기 힘들다.

대통령의 한마디에 거리 시민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현실이 낯설고 두렵다. 검찰 조사에 응한 참고인들마저 조국에게 불리했던 이전 진술을 줄줄이 뒤집고 있다. 사실을 존중하면 민주주의, 탄압하면 독재, 조작하면 전체주의라고 했다. 개인이 사실에 기초한 스스로의 견해를 갖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사고와 판단을 의탁하는 상태야말로 전체주의의 핵심 정서다. ‘진실의 확정’이 본업인 검사가 권력에 관한 일을 수사한 것으로 자리를 걸어야 한다면 한국 민주주의의 타락은 불가피하다.

kecor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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