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의 시작
다양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세계화란 생산을 소비에서 분리해내는 과정이다. 운송비는 생산과 소비의 단단한 결합을 설명하는 하나의 요인일 뿐이다. 상품의 이동 비용, 지식의 이동 비용 그리고 사람의 이동 비용이 생산을 소비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했다. 세계화는 이들 비용을 급격히 낮춤으로써 생산을 소비에서 분리해냈다. 문제는 상품과 지식, 사람이 이동하는 비용이 한꺼번에 하락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세기 초 가장 먼저 해결된 문제는 상품의 이동이었다. 산업혁명 시기 크게 향상된 운송기술로 인해 바다 건너에서 생산된 물건을 구입할 수 있었다. 중산층 영국인은 중국산 찻잎에 자메이카산 설탕을 넣어 우려낸 차를 마시며, 미국산 밀로 구워낸 빵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식과 사람의 이동비용은 여전히 높았다. 그 결과는 선진국(북)과 개발도상국(남) 간 소득격차 심화로 표현됐다. 지식의 이동비용이 높았던 탓에 북쪽 국가에서 촉발된 혁신적 지식은 북쪽 국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 현대적이고 혁신적인 성장은 북쪽에서 더 일찍 그리고 보다 신속하게 이뤄졌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 소득격차는 낮은 무역비용과 높은 통신비용의 결과였다.
ICT혁명과 세계화
1990년 무렵 시작된 정보통신기술(ICT) 혁명은 지식의 이동비용을 낮추기 시작했다. 통신기술의 급격한 향상으로 인해 복잡한 원거리 활동이 가능해졌다. 선진국들은 생산시설을 저임금 국가로 이전할 수 있었다. 이는 선진국들의 수익성을 높여주었다. 또한 이들은 해외로 옮겨간 생산시설에서의 프로세스가 국내에 남아 있는 단계와 완벽하게 맞물리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마케팅과 경영, 기술 등의 전문지식이 생산설비와 함께 개발도상국으로 넘어갔다. 오늘날 ‘글로벌 가치사슬’이라 불리는 국제적 생산네트워크는 이렇게 형성됐다. 글로벌 가치사슬로 인해 산업경쟁력을 나타내는 경계가 더 이상 국경이 아닌 이유다.
선진국의 전문지식과 개발도상국의 저렴한 노동력이 결합해 창출된 새로운 유형의 경쟁력은 기존 선진국가의 국내총생산(GDP) 점유율을 감소시켰다. 1970년대부터 조금씩 감소하던 G7(미국, 일본, 독일,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캐나다) 국가의 세계 GDP 점유율은 1990년 이후 3분의 2 수준으로 급감하더니 오늘날 전 세계의 절반 이하를 차지한다. 이들의 GDP 점유율 감소분은 다른 국가의 전 세계 GDP 점유율 상승분과 일치해야 한다. 리처드 볼드윈 스위스 국제경제대학 교수에 따르면 1990~2010년 G7 국가에서 감소한 GDP 감소분 17%포인트 가운데 14%포인트는 신흥 11개국(중국, 인도, 브라질, 인도네시아, 나이지리아, 한국, 호주, 멕시코, 베네수엘라, 폴란드, 터키)이 가져갔다. 그리고 약 200개가 넘는 나머지 국가에서 3%포인트가 증가했다. ICT혁명으로 창출된 새로운 경쟁력의 효과는 한정된 지역에서만 나타난다는 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상품과 지식, 사람의 이동 가운데 사람의 이동비용이 여전히 높기 때문이다. 운송기술 발달로 항공요금은 감소했지만, 관리자 혹은 기술자의 임금은 꾸준히 인상됐다. 글로벌 가치사슬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본국에서 파견된 전문가가 필요하고, 사람의 이동은 여전히 비용이 매우 높기 때문에 G7 주요 산업국의 인접국에만 그 혜택이 돌아간다.
4차 산업혁명과 세계화
ICT혁명이 지식의 이동비용을 줄여 글로벌 가치사슬을 만들어냈다면, 4차 산업혁명 기술은 사람의 이동마저 자유롭게 한다. 5G(5세대), 사물인터넷(IoT), VR·AR(가상현실·증강현실), 빅데이터, 3차원(3D) 프린팅, 인공지능(AI) 기술은 전문가가 해외 공장에 가지 않고도 현장에 있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 원격 조종으로 해외에 위치한 공정을 조절할 수도 있다. 값비싼 노동력이 직접 이동하지 않고도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세계화의 변모는 국가가 영향을 받는 방법이 다양해졌음을 의미한다. 비교우위의 중심이 국가에서 기업으로 넘어가고, 이는 보다 급격하고 통제할 수 없는 세계화가 이뤄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글로벌 가치사슬을 통한 산업화의 기적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소득격차를 완화시켜 줬지만, 노동자 1인당 지식의 불균형은 여전히 엄청나다. 불균형은 언제나 차익거래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노동자에서 분리된 노동서비스는 고급지식 전달의 매개체가 돼 저임금 노동과의 결합을 시도할 것이다. 여기에 인공지능 기술이 결합하면 원격지능의 탄생도 예상해볼 수 있다. 세계화는 단연코 고정불변의 개념이 아니다. 이는 경쟁우위의 원천이 계속해서 변화함을 의미한다. 모든 정부와 기업이 세계화의 변화를 기민하게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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