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경제석학들은 올해 또는 내년을 기점으로 한국이 연 1%대 저성장 국면에 진입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이들은 정부가 규제개혁을 통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는 식으로 정책 방향을 확 틀지 않으면 ‘L자형 장기 침체’를 피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6일 한국경제신문이 창간 55주년(10월 12일)을 맞아 다산경제학상을 받은 석학 11명을 대상으로 긴급 전화인터뷰 및 설문조사를 한 결과 전병헌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등 6명(55%)이 “올해와 내년 경제성장률이 1%대에 머무를 것”으로 예상했다. 나머지 5명도 “내년에도 경기가 회복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한경이 1982년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실사구시 정신을 기려 제정한 다산경제학상은 국내 경제학 분야에서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상이다.
경제석학들은 올해와 내년 성장률을 1%대로 전망한 이유로 △기업 투자 감소 △소비 위축 조짐 △미·중 무역분쟁 등 대외 여건 악화 등을 꼽았다. 경기 회복 시점을 내년과 2021년으로 꼽은 응답자는 1명씩에 그쳤고, 나머지 9명은 L자형 침체가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김병주 서강대 명예교수는 “밖에서나 안에서나 경기를 반등시킬 만한 요인이 하나도 안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 8월과 9월 연속 ‘마이너스 물가’를 기록하면서 불거진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 우려에 대해선 응답자의 91%(10명)가 “초기 단계에 진입했거나 진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답했다. 조장옥 서강대 명예교수와 최인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구조적 디플레이션 국면에 진입하는 양상”이라고 진단했다. 소비 위축이 지속돼 물가를 끌어내리는 압력이 높아질 것이란 판단에서다.
이들은 경제위기를 돌파할 해법으로 규제 완화(82%)를 꼽았다. 재정 확대와 소득주도성장을 해법으로 제안한 석학은 없었다. 정갑영 연세대 명예특임교수는 “정부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은 소득주도성장 정책으로 훼손되고 무너진 ‘경제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이라며 “경제 회복의 열쇠인 기업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노동·교육·환경 분야 규제를 대폭 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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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 커지고 소주성 실패…"정부, 경제학 원론과 싸우고 있다"
L자형 경기침체 우려 왜…
한국의 경기는 2년1개월째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지난달 통계청이 2017년 9월을 경기 정점으로 설정한 뒤 2년 동안 하강 국면을 이어가고 있다고 분석했기 때문이다. 다산경제학상을 받은 석학들은 이번 경기하강 국면이 역대 최장 하강 기간인 29개월(1996년 3월~1998년 8월) 기록을 깰 것으로 내다봤다. 회복되더라도 ‘U자형’ 반등이 아니라 ‘L자형’ 장기침체로 갈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석학들은 “대외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수출이 줄어들고 있는 데다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성장의 기둥인 소비와 투자를 억누르고 있다”고 진단했다.
“내년 성장률 1.7~1.8%”
한국경제신문이 창간 55주년을 맞아 다산경제학상 역대 수상자 11명을 대상으로 한 긴급 전화 인터뷰 및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석학은 올해와 내년 성장률이 정부와 한국은행의 전망치를 밑돌 것이라고 답했다. 정부는 성장률을 올해 2.4~2.5%, 내년 2.6%로 봤다. 한국은행은 올해 2.2%, 내년 2.5%로 전망했다. 11명 가운데 6명은 올해와 내년 성장률이 1%대에 머물 것이라고 답했다. 내년 성장률은 더 낮아질 것으로 우려했다.
김병주 서강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올해 성장률은 1%대 후반이고 내년에는 1.7~1.8%로 예상된다”며 “미국, 중국, 일본, 독일 경기가 일제히 내리막길을 타면서 국내총생산(GDP)을 떠받치는 수출이 흔들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전병헌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일본 수출규제가 이어지는 데다 미·중 무역분쟁이 장기화하면서 성장률 전망이 밝지 않다”며 “올해와 내년엔 1%대 성장률을 기록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 석학의 전망처럼 내년 성장률을 1%대로 제시한 민간연구기관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LG경제연구원과 모건스탠리는 내년 성장률 전망을 각각 1.8%, 1.7%로 봤다.
상당수 석학은 1%대 성장률의 원인으로 경제정책 실패를 꼽았다. 이승훈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임금인상, 고용보장 등과 같은 듣기 좋은 정책들을 실물경제에 적용하면서 부작용을 키웠다”며 “이런 정책들이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말했다. 대내외 불확실성이 부각되면서 기업의 투자심리가 움츠러든 것도 성장률을 갉아먹었다는 평가가 많았다. 유병삼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소득주도성장을 비롯한 정부의 친노동정책과 오락가락하는 규제정책으로 인해 기업이 체감하는 경영 불확실성이 한층 커졌다”며 “움츠러든 기업들이 투자를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진단처럼 기업의 설비투자는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다. 지난 8월 설비투자 증가율은 전년 동월 대비 -2.7%를 기록하는 등 지난해 11월 이후 10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보였다.
“경제·노동 정책 손질해야”
경기 회복 시점을 언제로 보느냐는 질문엔 11명 가운데 9명이 ‘장기간 L자형 침체가 지속될 것’이라고 답했다. ‘2021년부터 회복된다’와 ‘내년부터 회복된다’고 답한 석학은 각각 1명에 불과했다. 석학들은 잠재성장률(한 나라의 자본과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해 이룰 수 있는 성장률)이 갈수록 하락하고 있어 장기 침체가 이어질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펴낸 분석보고서에서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2016~2020년 2.5%에서 2021~2025년에는 2.1%, 2026~2030년에는 1%대 후반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석학들은 “저성장 경로에서 벗어나려면 정부가 소득주도성장 실패를 자인하고 경제·노동 정책을 대폭 손질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연세대 총장을 지낸 정갑영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특임교수는 “요즘 정부 정책을 보면 경제학원론과 싸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제 시행으로 노동투입량을 줄여 놓고 어떻게 국내총생산이 증가하기를 바랄 수 있느냐는 얘기다. 정 교수는 “자본투입량과 생산성이 그대로인 상황에서 노동투입량이 줄면 총생산도 감소한다는 것은 경제학원론의 기본”이라며 “성장률을 올리려면 규제완화로 민간 부문에서 투자와 고용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오상헌/김익환 기자 ohyea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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