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소련의 국가 자산을 불법적으로 차지한 신흥 재벌 올리가르히들이 고령에다 알코올 중독으로 제 역할을 못하는 옐친의 후계자로 고른 인물이 옛 소련 정보기관 요원 출신인 블라디미르 푸틴이었다. 권력을 장악한 올리가르히들은 테러를 연출하고 이를 진압한 영웅으로 푸틴을 등장시켰다. 압도적인 텔레비전 등장 횟수, 투표 조작, 테러와 전쟁 분위기 연출, 과거 강했던 러시아에 대한 향수 자극 등으로 푸틴은 2000년 3월 권좌에 올랐다. 불과 1년 전 지지율이 2%였던 그였기에 실로 놀라운 결과였다.
20년 이상의 장기집권을 계획한 푸틴과 올리가르히들은 개헌과 부정 선거 등으로 민주적 승계 원칙을 허물었다. 또한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반세기 전 죽은 파시즘 철학자 이반 일린을 소환했다. ‘교육받은 상층계급이 무지한 하층계급을 영적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일린의 사상을 전파하면서 민주주의 대신 과두제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내세웠다. 저항 세력엔 외부의 적이 러시아를 위협하고 있다며 서구 민주주의 국가의 사주를 받았다고 공격했다.
티머시 스나이더 예일대 사학과 교수는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에서 이렇게 출발한 푸틴 체제가 어떻게 러시아를 넘어 유럽과 미국 등지로 가짜 민주주의 내지 권위주의를 확산시키고 있는지 낱낱이 고발한다. 2014년 우크라이나 침공,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기까지의 과정을 세세하게 훑으면서 러시아발(發) 권위주의가 동구에서 서구로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저자에 따르면 푸틴은 일린의 기독교 전체주의를 중심으로 레프 구밀료프의 유라시아주의, 알렉산드르 두긴의 ‘유라시아 나치즘’을 결합해 러시아 파시즘의 뼈대를 세웠다. 서구의 부패와 유대인의 음모에 맞서 러시아를 지키고 팽창시키자는 게 유라시아주의다. 유럽연합을 약화 또는 해체시키고 미국의 민주주의를 흔드는 게 구체적인 목표다.
2014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그 서막이었다. 옛 소련 해체 후 우크라이나는 유럽연합 가입을 추진했다. 그러나 2013년 친러 성향의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당선된 뒤 유럽연합 가입을 포기하자 국민이 유로마이단 혁명을 일으켜 친러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러시아는 이듬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크림반도를 합병하고 유럽연합의 확산을 저지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이 러시아의 정보전과 사이버전(戰)이다. 푸틴은 트위터 봇과 인터넷 트롤(악플 등의 공격적인 행위로 타인을 괴롭히는 사람)을 동원해 ‘우크라이나가 크림반도에서 잔혹 행위를 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민항기 격추는 우크라이나의 짓이다’는 등의 가짜뉴스를 퍼뜨렸다. 우크라이나의 정부, 철도, 항만시설, 방위 시설, 송전소 등 주요 기반 시설을 해킹해 무력화하는 사이버 공격도 감행했다.
다음으로 푸틴이 겨냥한 것은 유럽연합. 푸틴은 독일 프랑스 폴란드 등 유럽 각국의 권위주의 광풍을 은밀히 지원했다. 러시아방송 러시아투데이(RT)는 물론 사이버전을 담당하는 비밀조직 인터넷 리서치 에이전시 등이 이에 동원됐다. 2016년 6월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앞두고 트위터에서 이뤄진 브렉시트 관련 논의의 3분의 1 이상이 봇에 의해 작성됐다. 정치적 내용을 트위터에 올리는 봇의 90% 이상이 인터넷 리서치 에이전시 소속이었다. 프랑스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영국 브렉시트당의 나이절 패라지, 스코틀랜드민족당의 앨릭스 새먼스 등 극단적 민족주의자와 파시즘, 분리주의자들도 지원했다.
특히 탄핵 논의까지 몰고온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러시아의 유착에 관한 구체적 증거들은 놀랄 만하다. 푸틴은 사실상 파산한 부동산 개발업자였던 트럼프를 성공한 사업가로 둔갑시키고 2016년 미국 대선 땐 힐러리 클린턴을 겨냥한 가짜뉴스를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구글에 퍼뜨렸다. 그 결과 사실과 허구가 정반대로 뒤집히고 주류언론 대신 가짜뉴스가 여론을 주도했다. 투표에 참여한 1억3700만 명의 미국인 중 1억2600만 명이 페이스북에서 러시아 콘텐츠를 봤을 정도다.
저자는 불평등이 심해지고 삶이 개선되리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을수록 이런 가짜뉴스와 권위주의는 더 힘을 얻고 확산된다며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라”고 조언한다. 그래야 역사 속에서 우리가 놓인 자리가 어디인지,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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