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박애 등 인간 정서 품은 자유민주주의

입력 2019-10-17 19:10   수정 2019-10-18 00:39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4막 ‘정원의 밀회’ 장면이다. 하녀 수잔나와 옷을 바꿔 입고 백작과의 밀회 장소에 대신 나간 백작부인은 스스로 가장했던 모습을 벗고 자신을 드러낸다. 당황한 백작은 부인 앞에 무릎 꿇고 부드럽게 노래한다. “미안하오, 부인, 미안하오, 미안하오.” 잠시 흐르던 침묵을 깨고 백작부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저는 훨씬 더 다정해요. 제 대답은 ‘좋아요’예요.” 이후 합창단의 노래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오늘의 고통, 광란, 어리석음. 사랑만이 행복과 기쁨으로 이를 끝낼 수 있지.”

미국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품위 있고 안정적인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감정을 어떻게 끌어들이고 배양할 것인가’를 넓고 깊게 논술한 역작 <정치적 감정>에서 ‘피가로의 결혼’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백작부인의 “좋아요”는 이 책의 부제이자 화두인 ‘정의를 위해 왜 사랑이 중요한가(Why love matters for justice)?’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핵심 열쇠다.

누스바움은 이 오페라를 새로운 형태의 공적 문화에 대한 논의의 지평을 연 철학 텍스트로 간주한다. 백작으로 의인화된 앙시앵레짐(프랑스혁명 이전 체제)을 허무는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공공 문화의 필수적인 토대가 되는 인간 정서를 탐색했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저자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이 작품에 온화하고 호혜적이고 여성적인 특성을 가진 새로운 공적 감정의 형태를 구현했다. 새로운 박애는 오페라 속 인물들의 장난기, 광란, 유머, 개별성이 자유롭게 뛰놀 수 있는 공간을 보호한다. 이 작품에 내포된 이런 정치적 입장은 후대의 존 스튜어트 밀과 라반드라나트 타고르에 의해 발전된 자유주의의 선조 격이다.

저자가 이 작품을 시작으로 문학과 예술, 철학, 심리학, 영장류학을 넘나드는 논증을 통해 끊임없이 강조하는 자질은 공감력과 동정, 연민이다. 그는 “인간 존재의 허약함에 대한 동정적이고 너그러운 태도가 공적 문화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박용준 옮김, 글항아리, 684쪽, 3만2000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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