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스웨덴 말뫼항에 있는 옛 코쿰스조선소 부지. 조선소는 1987년 폐쇄됐지만 여전히 옛 흔적이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부지 안쪽으로 들어가니 빨간 벽돌로 지어진 낡은 거대한 건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1987년까지 코쿰스조선소 본사로 쓰이던 곳이다. 황량한 외관과 달리 건물 내부에는 수백 개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의 연구실과 회의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이곳은 말뫼의 대표적 스타트업 육성허브인 미디어에볼루션시티. 옛 조선도시에서 정보기술(IT)·바이오 중심의 첨단도시로 화려하게 부활한 ‘말뫼의 기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다. 대학과 지방자치단체, 기업의 적극적인 산학협력이 말뫼의 기적을 이뤄냈다는 평가다.
말뫼대 설립 후 시작된 기적
1840년 설립된 코쿰스조선소는 1970년대까지 말뫼시 전체 고용의 25%를 담당했다. 1980년대 들어 위기가 찾아왔다. 코쿰스조선소는 한국 조선업에 밀려 경쟁력을 잃고 1987년 폐쇄됐다. 1990년대 초반엔 북유럽 경제위기까지 겹쳤다. 2002년 옛 코쿰스조선소의 골리앗 크레인은 1달러에 울산 현대중공업에 팔렸다. 말뫼 시민들은 떠나는 크레인을 보며 통곡했다. 스웨덴 국영방송은 이 장면을 장송곡과 함께 내보냈다.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말뫼의 눈물’이다.
주력 업종이 무너지면서 1990~1995년 말뫼에서 사라진 일자리는 2만7000개에 달했다. 1970년대 27만 명이 넘었던 인구는 23만 명으로 줄었다. 1990년대 초반 말뫼의 평균 실업률은 16%. 청년층 실업률은 22%까지 치솟았다.
반전의 계기는 대학 설립이었다. 스웨덴 정부와 말뫼시는 지역경제를 살리고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선 우수한 젊은 인재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998년 버려진 조선소 부지에 말뫼대를 세웠다. 5개 단과대학으로 이뤄진 말뫼대의 핵심 분야는 IT와 기초공학, 디자인, 미디어 등의 학문이 융합된 기술사회대다. 당시 스웨덴 정부와 말뫼시는 말뫼를 IT와 디자인 등을 중심으로 하는 첨단도시로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말뫼시는 정부와 유럽연합(EU) 기금을 지원받아 스타트업 육성 허브인 미디어에볼루션시티도 세웠다. 스타트업 500여 개가 입주한 미디어에볼루션시티는 말뫼대 기술사회대 건물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창업을 원하는 말뫼대 학생들은 학교 인근에 들어선 이곳에서 스타트업을 마음껏 준비할 수 있다는 게 말뫼대 관계자의 설명이다.
대학이 사실상 기업 유치
말뫼대는 지난해 기준으로 2만4000명의 학부생과 220여 명의 박사과정생을 보유하고 있다. 학생 수 기준으로는 스웨덴에서 아홉 번째 대학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 대학은 유럽에서도 대표적인 혁신대학으로 손꼽힌다.
말뫼대 기술사회대는 말뫼중앙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신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말뫼대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둘러본 기술사회대 내부는 대학 건물이라기보다는 기업 사무실을 방불케 했다. 건물 1층 입구엔 학생들을 위한 스타트업 창업 안내 공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말뫼대 관계자는 “이곳 학생들이 말뫼 경제를 지탱하는 스타트업과 첨단기업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스웨덴 일간 더로컬은 “말뫼대는 지역 스타트업에 최적의 인재를 공급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조선업 붕괴 후 추락했던 말뫼 경제도 말뫼대가 세워진 뒤 부활하기 시작했다. 말뫼에선 지금도 기업이 하루에 평균 7개씩 설립된다. 말뫼에 있는 스타트업을 통해서만 지금까지 6만여 개의 일자리가 창출됐다는 것이 더로컬의 설명이다. 지난달엔 유럽 스타트업 축제가 말뫼에서 열렸다. 스웨덴을 비롯한 EU 주요 기업들의 유럽 본사도 말뫼로 잇따라 이전하고 있다. 세계 최대 가구업체인 이케아 본사도 말뫼에 있다.
지난해 말 기준 말뫼 인구는 20여 년 전에 비해 40%가량 증가한 32만 명에 달했다. 지금도 옛 조선소 터에 버려진 공장 부지엔 각종 주택단지와 사무실을 짓기 위한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말뫼=강경민 특파원 kkm1026@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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