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준영의 논점과 관점] 'IT 강국'이라는 허상

입력 2019-10-22 17:34   수정 2019-10-23 00:25

싸이월드만큼 영욕(榮辱)을 겪은 인터넷 서비스가 또 있을까. 페이스북보다 5년 앞선 1999년 서비스를 시작해 ‘미니홈피’로 큰 인기를 누렸다. 2003년 SK커뮤니케이션즈에 인수된 뒤 회원 3200만 명을 거느린 ‘국민 소셜미디어(SNS)’로 성장했다. 하지만 모바일이라는 변화에 뒤처지면서 가입자가 줄줄이 이탈했고, 2015년 서비스를 중단했다. 2016년 에어라이브 품으로 들어가 재기를 노렸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다. 급기야 접속 중단 사태를 겪고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은 처지다.

싸이월드는 대기업에 인수된 뒤 특유의 벤처정신이 사라진 데다 해외 진출에도 실패했다. 개인정보 유출까지 겹치며 결국 무너졌다. 서비스를 진화시키지 못한 게 몰락의 근본 원인이지만 지금은 폐지된 ‘제한적 본인확인제(인터넷 실명제)’ 규제도 영향을 미쳤다. 국내에만 있는 ‘갈라파고스 규제’로 인해 해외 기업과의 경쟁에서 역차별을 받았다.

IT인프라는 1위, 제도는 33위

한국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정보기술(IT) 강국이다. 하지만 그 위상이 흔들린 지 오래다. 시장 주도권을 애플, 구글, 페이스북, 유튜브, 넷플릭스 등에 넘겨준 지 꽤 됐다. ‘초고속인터넷 강국’ ‘반도체 강국’ ‘스마트폰 강국’일지 몰라도 ‘IT 강국’이라고 하기 부끄러운 현실이다.

스위스의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19 국가경쟁력 평가’는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한국은 정보통신기술(ICT) 보급에서 2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모바일·초고속인터넷 가입자, 인터넷 사용자 비율 등 인프라에 대한 평가일 뿐이다. 공유경제, 핀테크(금융기술) 등 디지털 비즈니스에 대한 법적·제도적 체계를 평가하는 ‘기술 거버넌스’ 항목에서는 33위에 그쳤다. 신산업 ‘게임의 룰’을 확립하는 속도가 미국 독일 영국은 물론 중국 인도보다 더 느린 것으로 나타났다.

승차공유, 원격진료, 빅데이터 등 신산업이 각종 규제와 이익집단 반발로 싹을 틔우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한 결과다. 국내에서 서비스도 못 하는데 해외 진출은 언감생심이다. 유료방송 합병은 공정거래위원회의 늑장심사로 지지부진하다. 국경을 초월한 콘텐츠 전쟁에 대응해야 하는 기업들의 처지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5세대(5G) 이동통신은 심야 개통 쇼까지 하며 ‘세계 최초’ 타이틀을 따냈지만, 이용자들은 뭐가 달라졌는지 체감할 수 없다고 불만이다.

규제 풀어 혁신 이끌어내야

그런데도 정부는 ‘혁신성장’을 외치며 장밋빛 전망만 늘어놓고 있다. 세계 최고 5G 생태계를 조성해 2026년까지 일자리 60만 개를 창출한다는 목표를 내놨다. 미래 자동차산업 발전전략은 더 거창하다. 2024년까지 완전자율주행 제도·인프라를 세계 최초로 완비하고, 2027년 완전자율주행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겠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자율주행차 수천 대가 테스트 중이다. 기술 수준과 데이터 축적에서 한참 뒤처졌는데 어떻게 세계 1위를 하겠다는 것인지 아리송하다. 자율주행차 활성화를 위한 데이터 규제도 못 풀면서 이런 목표를 내놓은 게 놀라울 뿐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국경과 산업의 경계가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정부가 할 일은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이 마음껏 신기술과 서비스를 개발해 선보일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창의와 혁신이 칸막이 규제에 좌절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전 세계가 칭송하는 유·무선 인프라는 넓은 고속도로가 깔린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위에서 소프트웨어와 서비스산업이 뻗어가야 진정한 ‘IT 강국’이 될 수 있다. 언제까지 IT 강국의 허울에 매달릴 것인가.

tetriu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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