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차세대 컴퓨터 기술’로 평가받는 양자컴퓨터 관련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에 잇따라 투자하고 있다. 반도체, 휴대폰, 바이오 등 삼성의 기존 사업경쟁력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삼성이 이런 시너지 효과를 노리고 투자 규모를 단계적으로 늘려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소프트웨어에 이어 하드웨어도 투자
삼성전자는 22일(현지시간) 전략혁신센터(SSIC) 산하 벤처캐피털인 삼성카탈리스트펀드가 아랍에미리트(UAE)의 국부펀드 운용사인 무바달라캐피털과 함께 미국의 양자컴퓨터 스타트업인 아이온큐에 5500만달러(약 650억원)를 투자했다고 발표했다. 각각의 정확한 투자 금액과 지분율은 공개되지 않았다.
아이온큐는 양자컴퓨터를 활용해 차세대 클라우드 등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이다. 김정상 미 듀크대 전자컴퓨터공학과 교수와 크리스토퍼 먼로 메릴랜드대 물리학과 교수가 2015년 공동 창업했다. 극저온에서만 작동하는 다른 양자컴퓨터와 달리 상온에서 동작하는 독보적인 기술력을 보유했다.
ACME캐피털, 휴렛팩커드 패스파인더, 에어버스 벤처스 등 실리콘밸리의 대형 벤처캐피털도 총 2200만달러를 투자했다. 미국 1위 전자상거래업체인 아마존은 아이온큐 출범 초기 단계에 이 회사 지분 일부를 사들였다.
양자컴퓨터는 100억분의 1m에 불과한 원자 단위 이하의 물리적 속성을 활용해 연산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인 컴퓨터다. 기존 컴퓨터는 0 아니면 1의 값을 갖는 비트 단위로 정보를 처리하지만 양자컴퓨터는 0과 1이 동시에 될 수 있는 ‘큐비트(qubit)’ 단위로 연산한다. 여러 연산을 병렬적으로 처리하는 이런 특성에 힘입어 연산 속도가 슈퍼컴퓨터보다 수백만 배 이상 빨라질 수 있다.
양자컴퓨터의 정보처리 능력은 미래 정보기술(IT)산업의 판도를 뒤흔들 ‘게임 체인저’ 기술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손영권 삼성전자 최고전략책임자(CSO) 겸 전략혁신센터(SSIC) 사장은 이날 “양자컴퓨터 기술은 현재 초기 단계지만 트랜지스터, 레이저, 휴대폰처럼 삶의 일상을 확 바꾼 혁신기술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며 “신약, 인공지능(AI), 획기적인 신재료 등 분야에서 혁신을 불러올 열쇠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긴장하는 글로벌 IT업계
IBM,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글로벌 IT 기업도 그동안 양자컴퓨터 기술에 앞다퉈 투자했다. 지난달엔 “구글이 현존하는 슈퍼컴퓨터로 1만 년 걸리는 수학 문제를 3분20초(200초) 만에 푸는 양자컴퓨터를 개발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과학계에서 진위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양자컴퓨터가 지니는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미국, 중국, 유럽 등 주요 선진국은 양자컴퓨터 기술 개발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쏟아붓고 있다. SK텔레콤이 지난해 양자암호통신 분야 세계 1위인 스위스의 IDQ를 약 700억원에 인수하는 등 국내 기업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달 초 하버드대 양자정보과학연구소 출신 연구원들이 주축이 돼 창업한 스타트업 알리오에 투자하면서 양자컴퓨터산업에 발을 들였다. 상업용 클라우드에 양자컴퓨터 기술을 채택하고 있는 IBM 등에 비하면 후발주자다.
하지만 업계는 세계 1위 하드웨어 제조 경쟁력을 갖춘 삼성전자가 최근 양자컴퓨터에 잇따라 투자하는 것을 눈여겨보고 있다. 삼성전자는 휴대폰, TV 등 하드웨어 제조와 유통 과정에 양자컴퓨터를 활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컴퓨터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반도체, 배터리 기술 등을 보유하고 있다. 업계에선 삼성의 참전으로 IBM, 구글 등 소프트웨어 업체가 주도해온 양자컴퓨터 연구개발 국면과 다른 양상이 벌어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공급 측면에서 양자컴퓨터산업에 다양한 부품을 공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수요 측면에서 양자컴퓨터의 다양한 혁신기술을 가져다 쓸 수 있다”며 “삼성의 투자는 이제 시작 단계일 뿐”이라고 말했다.
실리콘밸리=좌동욱 특파원 leftk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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